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專氣致柔(전기치유)와 工夫(공부)(45회)
 홍기성 
  | 2001·07·15 17:09 | 조회 : 2,610 |
오늘은 괜찮은 영화 두편을 소개해주었는데, 한편은 박하사탕이고 또한편은 춘향전이라고 합니다. 춘향전에서 도올 김용옥은 두가지를 고치었으면 하는 영화비평을 했습니다. 춘향전은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로 판소리를 가지고 판소리를 이해시키는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잘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첫째로 판소리를 하는 창자와 관객의  모습을 잘못 찍었다고 합니다.  추임새란 창자 고수 청중과의 교감을 나타내는  소리이고 그것은 오랜 숙력을 거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며 일정한 형식과 타이밍이 있다고 합니다. 켤코 아무렇게나 난잡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민속연구회 사람들은 이말을 쉽게 이해할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추임새에는 아주 철저한 미학이 있다고 합니다. 추임새도 창자와 강약의 변화의 리듬에 따라 자연히 강약과 고저의 변화가 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절제된 乘時(탈 승, 때 시)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고전극을 연희할때 춤과 대사의 중간중간 얼쑤나 그렇지 옳고 말고등... 몇가지 절제된 추임새가 있습니다. 연희자와 장구잽이가 관중이 정확히 맞아 떨어져야 추임새가 나옵니다.  마당판을  잘 요리하여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말로 얼씨구같은 추임새가 나와야 그 판이 신명이 도는 것입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변사또와 이도령의 마지막 암행어사 출두장면의 대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암행어사 출두의 명분은 어떠한 경우라도  춘향이와 이도령 변사또의 삼자만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된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사또의 학정으로 인한 것이며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을 암행하는 관리로서  민의를 조사하고 그것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암행어사출두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변사또와 이도령의 마지막 대화에서 이도령이 변사또의 물음에 나약한 대답을 해서 암행어사출두의 상황을 춘향이와 이도령 변사또의 삼각연애관계로 몰아 갔다는 것입니다. 이몽룡의 "어사출두"는 법제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성춘향과는 무관한 사태로 확실히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예술의 보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 보편적의미가 본질적으로 이해되어 새로운 창조적 예술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말입니다. 후배여러분들이 꼭 새겨들고 의미를 되씹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이 동양적인 것들이 유행이 되어 벼라별 잡것들이 다나와 상품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氣가 매우 신비화되어 있다라는 것입니다. 기라고 하면 공중에 붕떠있는 듯한 어떠한 신비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기를 신비한 것으로 관련지어 말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이세상에 신비(동양에서 신비는 단지 동양인이 파악하는 물질 자체가 생명임을 암시할 뿐이라고 한다)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신비로운 것일까? 도대체 무엇인가? 신비해서 무엇을 할려 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초능력을 생각해본다면  손목시계가 귀한 시절 사람들은 감으로 시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도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지금이 몇시 몇분인지 대략 맞춥니다. 우리가 시간에 대한 감각이 시계가 들어오면서 무디어져 소멸되었다고 합니다.   즉 인간문명의 발달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자연적 능력을 감소시켰다는 것입니다. 내가 천리안을 가지고 있는 초능력자이라고 한다면 모두들 신비하다고 하겠지만 독수리는 몇십마일에 있는 개미를 구별할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독수리의 능력을 보고 초능력이라 하지 않고 자연적 능력.현상이라
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도 이러한 자연적 능력의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차력에서 손으로 못을 박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도올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못은 망치로 박으면 됐지, 그것을 평생 수련해서 겨우 손으로 나무에 못을 박는 다는 것이 무엇이 신비하다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도올 김용옥은 말합니다. "길거리에 있는 풀한포기 이상의 신비는 없다" 라고 말합니다. 현대물리학도 의학도 생물학도 생리학도 화학도 풀 한포기를 제대로 해석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풀한포기의 생명 이상의 신비가 어디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신비라고 합니다. 여기 이상에 어떤 신비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氣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몸에 기운을 원활히 유통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동양사상을 변화하는 세계이고, 정체됨이 없다고 합니다. "항상 기를 오로지 한다"는 것은  기가 순결하게  체하지 않게 항상 기를 돌게 만들어  내 몸을 부드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 76장에서 이런말이 있습니다.
  "柔弱者 生之徒" (유약자는 생의 무리이다)
  "堅强者 死之徒"  (견강자는 죽음의 무리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뭇잎의 야들야들한 푸른 잎들이 생명이고, 딱딱해진 나무밑둥의 두꺼운 껍질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산다는 것은 몸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專氣(오로지 전,기운 기)를 工夫(공부)라고 합니다. 공부의 원래 글자는 功扶(공부)입니다. 중국인들은 공부라는 말을 몸의 훈련, 즉 신체를 통해 숙달하는 그러한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는 훈련이라고 합니다.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한석봉이 글을 쓰는 것과 그의 어머니가 떡을 쓰는 공부는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공부라는 것은 근세에 들어와서 내머리를 훈련하는 것도 내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공부하고 했다고 합니다. 머리속의 개념적 훈련을 공부라고 번역한 것은 우리나라의 강한 주자학 전통이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주자학의 "近思錄 에 나타나 있다).
일본은 "to study"의 일어역을 "벤코오스루(억지로 공부하다)"로 번역했고, 중국은 "to study"의 번역에 있어 공부라는 것이 원래부터 있었던 말이라서 "니엔스(책을 읽는다)라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to study"의 번역을 주자학적 개념의 공부라는 말을 쓴다고 합니다.
공부라는 것은 꼭 머리를 쓰는 것만 아니라 내 몸도 단련하는 것이라 합니다. 내몸이 있지 않고 어떻게 공부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몸을 건강하게 단련하고 유지하는 것도 머리로 공부하는 것과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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