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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탈춤 이야기 | 풍물 이야기 | 문화 이야기 | 고전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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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배와 후배님과의 만남(보충자료)
 홍기성 
| 2002·11·22 15:06 | 조회 : 5,642 |
  풍물굿은 상쇠놀음입니다. 여기서 상쇠놀음이라고 말한 것은 풍물굿은 상쇠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풍물굿이 상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말로 들리겠지만,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생전의 양순용선생님은 옛날에는 풍장을 상여두는 곳이나 서낭당에 두었는데, 마을 아이들이 몰래 꺼내어 치다가 어른들에게 혼쭐이 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장 자체가 사실 점잖은 악기는 아닙니다. 양반들이 제례나 풍류를 즐길때 쓰이는 악기는 현악기와 같이 음색이 있는 점잖은 연주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풍물굿의 기원을 고대의 제례의식에서 보는데, 일견 타당합니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인류는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의 사회였습니다. 특히 고대의 왕들은 그 모습이 기이하고 卜(점)을 잘치고 易을 잘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술적인 것이 세계에 대한 이해방식이었고, 이로써 죽음의 공포에 대한 해소와 사후세계를 보장받았으며, 자연이 내리는 무지막지한 재해의 공포에서 벗어날려고 했습니다. 고대에서는 선지적 지식을 가진자들이 왕이 되었고, 지배귀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상식의 시대에 살고 있고, 인간삶이 보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고등종교가 형성이 되는데, 이러한 모든 종교들이 무지막지한 인간의 삶들을 보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삶으로 정립하기 위한 인류의 인문학이라고 생각하면 맞는 말일 것입니다. 박물관에 가서 고대의 유물을 보면 가장많은 것이 제사때 올리는 제기와 무기입니다. 제사때 올리는 제기는 그 모습자체가 매우 신비스럽고 화려합니다. 전쟁에 쓰이는 무기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길어지고 단단해져 있습니다. 인류의 초기의 삶은 이토록 주술적인 신비와 전쟁과 노예제로 일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문명의 기저에는 이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해두면, 현재 우리의 삶이라는 부분에 적잖이 이러한 비상식적인 체계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의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IT(정보기술)산업에 종사하는 졸업생이  탈신이 깃든 나무라고 해서 자료실에 사진을 올려놓은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기실 우리 민연에는 탈신이 있다고 믿는사람들이 있었으며, 탈신은 우리 민연을 지탱하는 정신적 구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탈춤자체가 묘하고 신비합니다. 탈마당에는 신이 있어 탈마당은 항상 정갈해야 하고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되는 소중한 지역이었습니다. 그 졸업생은 물론 그러한 분위기속에서 민연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선배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풍물이 제례에 기원을 둔다는 말은 동감하지만, 그렇다고 풍물이 무당과 같은 주술적이지는 않습니다.
"좌도는 무속이 아니야" 라고 말한 양순용선생님은 무속과는 다른것이 풍물굿 마을굿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락이 지나치게 난잡해지는 것을 경계를 하셨습니다. 좌도가락의 순수성을 보존하기보다는 가락이 지나치게 난잡해지면 사람이 흘러버린다는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전수를 해준 대학을 방문하면 학생들이 장구만 치고 있다라는 것에 매우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째 공부는 안하고 장고만 친다는 것입니다. 양순용선생님의 풍물굿은 눈을 까뒤집고 치면서 느끼는 절정의 쾌감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서로 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쇠 장고 북등은 어떻게 보면 잡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친듯이 거리에서 춤을 추는 젊은이나 미친듯이 쇠장고를 두들기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명한 선조들은 바쁜 일상적 삶속에 이러한 잡기들이 끼지 못하도록 풍장들을 마을의 후미진 곳, 상여를 두는 창고나 서낭당에 보관했던 것입니다.
우리 민연인들은 거의 매일 탈춤과 풍물을 연습합니다. 그래서 후배들의 굿내는 실력은 수준급입니다. 그러나 우리선조들의 농번기에는 새벽에 나가서 해가지면 돌아오는 강도높은 노동을 하였습니다. 민연인들이 연습을 하는 것처럼 당시의 선조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며 그래서 평상시에는 입장단으로 한배를 익히고 농한기나 마을굿 몇일전에 풍물을 연습했을 것입니다. 우리 민연의 경험으로 보아서는 이정도의 연습으로는 도저히 신명나는 굿을 내지 못했을 것이고, 걸립은 애초부터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을굿이 이루어졌고, 이마을 저마을 걸립을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사당패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풍물의 장단이 현재 너무 현란하고 복잡해지는 경향을 발견합니다. 사실 매고치는 풍물은 기닥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휘몰이에서 '기닥'은 물론 '기'도 빠진다고 양순용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가락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매고칠때, 기닥을 넣은 장단이나 그렇지 않은 장단을 잘 비교해보면 기닥을 넣지 않는 장단이 오히려 착착 잘 들어맞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단이 구성되면 어려운 기닥을 치지 않아도 되는 수고를 줄일 수 있는 것이고, 입장단을 구성하기에도 매우 용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대학생들은 열심히 더 복잡한 것에만 몰두합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있듯이 가락은 원박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전수를 가는데, 이것은 매우 비능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락은 원박으로 만족을 하고 풍물굿 진이야 지금이나 예나 거의 변한 것이 없고, 아직도 이글을 쓰는 본인도 진은 이끌수 있기에 더이상 배울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대농대 풍물패들이 양순용선생님께 4년정도 전수를 들어오고는 더이상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더이상 들어올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풍물굿의 진은 상쇠가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여 짜여지는 것입니다. 양순용선생님은 전수 당시 가죽소리를 듣고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토바이를 타고오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인근마을사람들과 대학생들을 데리고는 풍물굿을 치면서 진을 짜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쇠에게 모든 지휘권이 일임되어 있는 구조이며, 상쇠만이 진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서있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의 삶속에서 마을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풍물굿은 이처럼 적은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한 방식으로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상쇠말고는 특별히 고민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실력있는 상쇠들은 재력있는 마을로 스카웃되어 소작을 주고는 마을굿을 이끌게 했습니다. 양순용선생님도 그러한 분 중에 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상쇠에 따라 그 마을의 풍물굿이 좌지우지 되었던 것으로, 마을에서 마을굿을 열수 있는 여력이 없거나 실력이 되지 않는다면, 인근마을의 풍물패를 초청하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바로 마을간에 걸립으로 이야기 될 수 있으며, 그러한 걸립패들은 항상 들어가는 마을입구에서 시험을 받았고 실력이 좋으면 들어오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걸립패도 시시하다면 사당패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당패는 지금의 말로 말하자면 전문연희패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많은 연희패가 있지만, 서민들의 깊은 삶속에 까지 들어갈 수 있는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연희패들은 풍물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공동체문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전문연희패들은 시대에 맞는 마을굿을 만들어야 하며, 풍물굿을 보급함에 있어 단순성과 능률성을 검토해야 합니다. 즉 풍물굿은 상쇠의 일사불란한 지휘로 연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만든 제도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인간이 무리를 짓는 가장 최소의 단위는 마을입니다([노자철학이것이다] 도올 김용옥, 통나무,p251~ 제도사의 암시). 백두산이야기라는 동화책(글 그림;류재수, 통나무)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도 차츰 많아지고 땅위에 여기저기서 마을을 이루며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이라고 부르는 끝없이 넓은 들에도 여러 마을이 모여 나라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지금의 만주벌판도 그때는 다 조선땅이었지요. 그들은 착하고 씩씩했지요."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쉽게 표현하는 구절로 우리에게는 國이라는 개념은 나중에 생긴것으로 國이 있어 家가 존재하는 것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애국심 자체가 허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國이라는 것과 家라는 것은 다른사태의 일입니다. 고려왕조가 무너져도 우리의 가족은 해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무너지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에까지 우리사회를 지탱해온 원동력의 기저는 바로 가족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 말하는 윤리가 가족이라는 최소의 단위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가족을 제외한 최소한의 인간무리의 제도는 바로 마을이었고, 마을의 역사는 최근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으로 이러한 마을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씨족이나 부족적 삶을 지닌 초기의 인류는 평등사회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평등사회가 농업의 정착과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인한(농기구나 수로의 이용이나 농법의 개량) 부의 축척으로 생산물간의 유통이 생기면서 평등한 씨족사회나 부족사회는 급격히 해체되었을 것입니다. 부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체제로 들어서면서 씨족이나 부족을 지탱하는 관습과 규범적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이념이나 규범이 싹트기 시작하였고(국가의 출현),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부합하는 인간관을 정립하는 종교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세의 조선시대에만 하더라도 조선왕조의 말단행정구역은 마을이었고, 그러한 마을들은 지금과는 사뭇다른 농업에 있어 재생산을 보장해주는 단위이며, 외침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해주는 단위입니다. 조선은 10만대군을 유지해본적도 없고 우리의 역사에서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조선의 방위는 특이하게도 마을을 정점으로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방위도 관군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방위를 담당하는 크고 작은 마을로 이루어졌던 것이고, 풍물이 지극히 전투적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산활동이 개별로 이루어지고 각종 세금과 군복무의 의무가 개별화되어 있어 동과 리로 나누는 행정구획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한 것일뿐 동리 자체를 재생산체계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마을을 행정구역의 체계속에 넣으면서 마을이 갖는 자치성을 행정체계속에 편제하여 개별인신지배를 이루려 했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마을의 폐쇄성과 자치성을 사환권이라는 일종의 나라의 役(역)에 대한 복무의 대가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良人(양인)의 개념으로서 종래의 마을내부의 질서체계를 국가가 부여하는 공권력이 통하는 질서체계로 바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役을 질 수 있는 家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단혼소가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혈연적관계를 이루면서 재생산이 보장되는 家門(집안)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집안이 모여 성씨공동체마을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토호는 바로 이러한 가문이 세력이 큰 것을 말하며, 조선왕조는 이처럼 통제되지 않는 자들을 한량이라고도 부르면서 공권력안에 편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사환권을 주면서 국가의 역을 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왕조 개국 초기에는 이러한 사환권이 마을내부의 家들에게 균질하게 적용되었으며, 이렇게 균질화된 자들을 양인이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한량도 토호도 최소한의 역을 질수 있는 家들도 양인으로 균질화되어 파악되었습니다([조선후기사회경제사] 이영훈 한길사, [조선전기농업경제사] 이호철 한길사, {조선전기사회경제사] 한영우 을유문화사, [조선중기국가와사족] 김성우 역사비평서,[조선후기 향촌지배정책연구] 오영교 혜안.). 재생산이 보장되지 않는 家들은 국가의 호적에 파악되지 않은채, 토호의 울타리안에 포섭되어 인격적예속을 받으며 主家(주가)의 재생산구조속에 매몰되거나 혹은 노비가 되었던 것으로 이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비근비근 살다가 가족이 해체되거나 굶주려 몰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료적 중앙집권체제가 갖는 긍정성은 사회전반을 공적이면서 개방된사회로 이끌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관료의 도덕적 해이로 인한 공적체계가 쉽게 무너지면서 무지막지한 공권력의 피해를 고스란히 인민들이 받을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으며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을 바라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방분권적인 자치체제는 국가의 공권력에 대해 방어적일 수 있지만, 사적인 측면이 부정적으로 작용하여 사회전반을 공적이고 개방된 사회로 이끌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또한 우리의 지방자치체의 현실을 보면 쉽게 느낄수 있는 것입니다.
권력의 핵심부가 부패하고 무능하여 조선개국 초기의 건강한 공적체계가 와해되면서 왜란으로 인한 조선인민이 도탄(塗炭)에 빠져 있을 때, 성리학으로 무장한 지방의 양반귀족들은 정계로 진출하여 도덕정치를 구현할려고 하였고, 지방에서는 공권력의 피해을 줄이기 위해 수령권과 대치되는 자치조직을 만든 무리를 우리는 사림파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성리학으로 무장한 양반들이 향촌의 안정과 교화를 위해 향약을 조직하고 향교와 서원을 세워 지속적으로 중앙에 자신들의 이념으로 무장된 관료를 배출하였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성리학으로 무장한 토착세력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정치귀족화하는 경향성을 가지면서 양반이라는 초기 양반의 개념과 다른 토착적 이해관계를 인정해주는 신분이라는 것으로 고착되어가는 부정적 측면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양반이라는 신분적 고착의 부정적측면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림파의 성장은 왜란과 호란의 난리속에 폐허가 된 향촌을 안정화시키고 재건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왕권의 무능과 타락을 성리학을 이념으로 도덕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남인계열의 사림파들은 과거제 철폐를 주장했던 이유중 하나가, 과거제로 인한 관료의 선발이 그 사람의 인품과 도덕성을 가늠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과거제는 모든 지연과 혈연 학연을 배제하는 관료선발의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제는 관료당사자들이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지못할때, 공권력의 부패와 부정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폐허가 된 향촌을 사림파들은 향약을 시행하여 풍속을 교화하였고, 농업기반시설을 정비하여 농업생산에 있어 재생산기반을 갖추는데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령권의 강압적 폭압속에서 향촌의 인민을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근대이전의 마을은 농업의 재생산을 보장해주고 외적의 침입, 국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공동체적 질서를 갖는 최소의 인간무리의 제도였습니다.
이러한 마을이 조선후기로 가면서 마을내외부에서 커다란 질곡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갖는다는데 커다란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우선 양반이나 토호들의 농업생산의 기반인 노비제가 와해되어가면서 그들의 농토를 자작경지한도만 자경하고 나머지는 소작으로 방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반이나 토호의 울타리에 있던 비약한 家들(협호)의 인격적 예속에서 벗어나 소농경영인으로 자작농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과,  마을의 上下民(상하민)들이 모두 전을 내는 공동납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선민중의 집약적농업의 발달로 인한 것으로 예전의 노비들의 노동력으로 구성된 집단협업에 의한 영농과 身貢(신공)을 받는 그러한 조방적이고 저급한 농업생산방식은 노비제가 와해되는 과정에서 집약적농업방식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때의 집약적농업방식이란 지금과 같이 다량의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해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다량으로 확보하는 약탈적 방식이 아니라, 분산된 농토에서 최소한의 가족노동력을 합리적으로 쓰기위한 방식으로, 분산된 농토에 시간차를 두어 집중적으로 노동력을 투입하는 방식과 농우나 농기구의 마을내 공동사용, 그리고 마을내 노동력의 적절한 배치를 위한 노동공동체인 두레의 성립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양반이라는 개념은 초기에는 문무관료들을 총칭하였지만, 조선중기로 내려오면서 신분제로 굳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중기 이후의 양반은 체제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비가 있어 경제가 어느정도 달성되면서 학업에 몰두하는자들 말합니다. 빈농한 집안이라도 출중한 학문이 있다면 그 또한 양반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누구든 양반이 될 수 있는 소질이 다분한 것입니다. 조선후기 말기에 가면은 조선인민 전체의 70~80%가 양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인민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을 말하며, 양반의 문화를 하층민들이 받아들일정도로 보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도 이와같은 하층민의 성장에 행정체계도 토착세력과 일면 타협하던 태도에서 성숙한 마을내의 질서와 하층민의 사회경제적지위의 상승에 알맞는 행정제도를 정비해나갔으며, 마을내 토착세력을 배제한 행정체계를 이루려 했고 이것이 面里制(면리제)나 五家作統制(오가작통제)로 표현되었습니다. 전국적 장시의 발달로 굳이 생업을 농업에만 목을 매지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마을내 성원들은 입속과 탈락이 빈번하였고, 마을공동체는 개방적인 형태로 운영되었던 것입니다. 마을내 토호나 양반의 지위가 사라지고 모든 家들이 공동으로 전을 내어 공동납세를 하면서 토착적 이해관계나 특별한 신분적권위가 부정되는 상황은 마을의 계나 두레의 운영을 마을공민들이 민주적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지금 남북간 길이 열리면서 시베리아 횡단 대륙철도가 연결되는 마당에 공동체가 어떤 의미를 주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도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열성인데, 오직 우리 민연만이 공동체문화건설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많은 공동체마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마을의 대부분이 종교단체부터 시작이 되었고, 꼭 종교단체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어도 마을공동체를 이끄는 신념만은 거의 종교적인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의 마을공동체의 주된 핵심은 공동생산 공동분배 그리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시빈민들과 또는 거지들을 모아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 정착한 공동체도 있고, 환경에 대한 신념만으로 뭉친 생태마을공동체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공동체가 일반사람들에게 적용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로 살기란 어떤것인가? 우르과이라운드라는 세계경제의 질서속에서 농업자체가 경쟁력을 갖기란 불가능하고, 도시적인 삶은 서로가 개별적인 경쟁과 핵가족화의 진행으로 공동체를 이루기에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공동체로 살자, 더불어 사는 삶을 꾸리자고 부르짖는데, 공동체삶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정확히 집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아니 인류는 초창기부터 공동체적인 삶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씨족적이든 부족적이든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무지막지한 자연재해와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는 농업생산에 있어 재생산이 보장되는 단위였습니다. 이때의 씨족이나 부족의 운영은 민주적방식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씨족들이 모여 지역을 기반으로 부족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러한 부족안에는 여러씨족이 있으면서 서로 통혼을 하면서 작게나마 혈연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부족이 좀더 크게 통합되면 바로 국가의 탄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씨족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국가의 통합은 바로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출현으로 부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러한 이동으로 인한 부가가치는 상업이라는 인간특유의 생산물 유통방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초창기 씨족들의 전쟁은 좋은 환경을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본능적인 생존경쟁으로서 의미가 있었겠지만, 부의 이동이 가능한 시대에는 부를 획득하고자하는 인간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토기와 연장 그리고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무기입니다. 토기와 연장의 발달에 못지않게 무기도 세련되게 그리고 길게 강하게 발달하였습니다. 초기의 마을은 평등적 씨족관계로서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은 장노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해결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의 이동이 가능한 시대에는 마을내부에서도 家들의 부에 대한 격차가 생겼을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근대이전의 생산성은 주로 노비나 노예에 의한 착취였습니다. 물론 근대에도 이러한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근대는 전근대의 신분적 제억압이 형식적으로나마 철폐되고 인권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근대의 마을은 호세한 양반이나 토호들의 울타리가 바로 마을의 범위이었습니다. 전근대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인류의 한계이며, 근대와 전근대의 구분의 기준은 산업혁명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인권이 성립한다는데 있고, 인간의 무리들이 좀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회로 간다는 것과, 근대국가의 출현으로 모든 국민이 최소한 법률적으로나마 권리나 의무를 갖춘 시민사회로 간다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풍물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전환점에서 조직화된 공동체문화이며, 풍물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후기 이후로 마을은 집약적농업의 발달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상업의 발달로 이어졌고, 굳이 농업생산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고 노비제를 바탕으로 조방적 농업을 이끌던 토호나 양반들은 경제적으로 위축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유교적질서의 몰락과 서학(천주교)의 도래로 기존의 사회적 관습적 질서가 흔들리면서 양반과 토호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되었으며, 조선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지위향상과 발맞추어 조선의 왕조는 새로운 국가질서를 세울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유교의 이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왕조는 세계사적 대조류속에 몰락했던 것입니다.
탈춤은 우리민중들에게 보편적인 연희는 아닌것 같습니다. 지역적 특색이기는 하지만, 양순용선생님도 탈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탈춤 자체가 상업적으로 성숙한 도시지역에서 주로 열리는 것을 보아서는 농민문화인 풍물굿과는 사뭇다른 양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탈춤을 춘 사람들은 대개 吏胥(이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탈춤이 상업이나 무역이 발달된 곳에서 성행했고, 탈춤자체가 최근에 복원된것이라 원형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전수자들의 가물가물한 어릴때 기억으로 탈춤을 구성한 것입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세계정세는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세계무역이 본격화되는 시기였습니다. 대량산업자본주의를 가능하게 만든것중 하나가 곡물의 저가의 실현입니다. 대량의 저가의 곡물을 얼마만큼 확보하느냐가 그 나라의 자본주의 정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까지 저농산물가격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의 산업과 거대한 도시들은 농촌의 피와 땀을 빨아먹은 레비아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적 모든 억압이 형식적으로 사라진,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경제적관계만이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분제의 와해는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는 요소중 한부분으로서 우리에게 있어 자본주의는 절대적빈곤을 벗어날수 있고, 누구든 자신의 능력만으로 부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선도 후기에 와서는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업의 발달로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었고, 사회경제적으로 성숙한 인민들과 왕권과의 관계도 새롭게 설정되어가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우르과이라운드를 우리는 격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우르과이라운드는 남아도는 농산물과 공산품의 적절한(?) 교역을 위해 각국의 생산을 조절하자는 것입니다. 세계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한 무역질서로 각국의 특수성은 무시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흐름을 우리가 막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질서재편에 우리가 발빠르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세계경제의 재편적인 질서에 대응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매우 패배주의자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미 세계경제는 인간의 순박한 이성과 감정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들이 거대하고 조직화된 세계무역질서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여간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도 당시의 세계정세의 흐름에 따라 제도나 법을 정비하여 국가를 산업자본주의로 나갈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어야 했습니다. 당시 국내에도 신분제의 와해와 상업의 발달로 기존의 질서로는 도저히 변화하는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선조들은 오랫동안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마을공동체는 생산을 보장해주는 재생산단위이며,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단위이며,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최소의 단위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이러한 생각에 커다란 공감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생산활동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고 도시적인 삶이 보다 보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에 있어 전원생활은 하나의 특권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원생활이라는 것 자체도 농촌자체가 해체되어가는 마당에 커다란 의미를 가질수 없습니다. 단순한 전원의 동경만으로는 도시적인 삶을 살았던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심각한 고민없이는 실증이나게 마련입니다.
조선후기 신분제의 와해와 상업의 발달로 굳이 농업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현실에서 마을민의 입속과 탈락은 매우 빈번하였을 것이며 그러한 마을공동체의 운영형태 역시 보다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유교적 이념으로 조선왕조를 다시 구성할려고 했던 관료들과 왕들은 이러한 민의 사회경제적변화들을 무시한채, 그리고 세계질서의 변동에 대응하지 못한 결과는 결국 우리후대의 몫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선조들의 마을공동체는 모든 생산수단의 공유가 아니라 노동력의 공유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력의 합리적 이용뿐만아니라, 과거 성리학을 바탕으로 향약을 시행했던 양반들의 도덕적인 마을내의 질서를 보다 체화시켰습니다. 한 예로 촌회에서 징계하는 것들을 보면은 "도울수도 있는데, 돕지 않고 방만한 사람에게도 도덕적 책임감을 물어 징계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농촌은 이러한 윤리를 잊어버리면서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와 경쟁주의 한탕주의에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은 도시보다 인심이 악화되어 있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욕심이 나는게 바로 돈입니다. 자본주의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욕망을 최대한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중 극소수만이 성공을 한다고 합니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아니면 저급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도시문화는 소비문화입니다. 도시라는 것은  인류의 처음부터 소비적이었습니다. 귀족들이나 왕이 살았던 곳으로 그러한 사람들의 사치품의 생산과 교환을 위해 상인과 장인 그리고 왕을 호위하는 귀족들의 터전이었습니다. 지금은 도시생활이 보편화되어있지만, 최근세까지만 하여도 도시생활은 바로 돈과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선택된 자들의 향유였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 물질이 풍요로워지면서 누구든 도시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도시생활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도시생활자체가 소비적이기 때문에 돈이 없이는 수준높은 문화를 누릴수 없는 것입니다. 다세대가 밀집해 있는 주택가는 대부분 부부들이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들이 길거리에 방치되다시피하고 있습니다. 한참을 커나갈 아이들이 부모님이 챙겨주시는 간식대신 구멍가게에서 군것질을 하고 있고, 부모의 보호와 관심아래 인성이 자리를 잡아갈 시기에 길거리에서 오락기나, 학원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도시의 삶은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롭지만 돈이 없이는 누릴수 없는 것으로 도시의 빈민들은 정말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들 조차도 빠듯한 생활속에서 내집마련의 목표아래 허리띠를 조여매고 있는 실정입니다. 공동체의 회복이란 우리의 인간성의 획복이며, 함께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남의 아이를 내아이처럼 생각하는 삶입니다. 치열한 경쟁의 삶속에서 받는 강한 스트레스는 우리를 암으로 몰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는 제도는 바로 우리조상들이 살았던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재산의 무소유가 아닌 윤리를 회복한 공동체입니다.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서원 답사기 03·08·14 5854
  서원 답사에 앞서
 홍기성
02·07·27 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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