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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고향 산음 (1)
 홍기성 
| 2002·05·31 11:22 | 조회 : 5,506 |
허준의 고향 산음 (1)
산청은 허준이 한약방을 열었던 곳으로 몇년전 텔레비젼에 동의보감으로 나왔던 곳으로 산음이라고도 한다. 거기에는 성철스님의 생가가 있었고, 문익점선생의 목화시배지와 사당이 있었다. 그리고 운좋게 약초축제 마지막날이었다. 또한  그곳은 지리산을 바로하기 때문에 레프팅이나 페러글라이딩과 같은 스포츠를 하기 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산청에 들린 이유는 다른 이유에 있었지만, 다른곳도 볼수 있어 매우 즐거운 답사가 되었다. 아직은 상업적 관광지역이 아니어서 산청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어 좋았지만, 이제는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뚫리어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것 같다.
  수원을 출발 대전까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내려가서 35번 고속도로(무주 함양)로 진입하였다. 대전을 지나 무주 함양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정말로 첩첩 산중이었다. 35번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이곳은 오지로 통하였다. 책에서만 읽었던 토호들의 무단작폐에 대해 이곳을 지나면서 이해를 하게 되었다. 조선중기때에 임금이 토호들을 단속하기 위해 감사를 보내면, 토호들은 감사를 죽이거나 농락하여 돌려보내기 일쑤였고 그렇지 않으면 인근주변의 마을사람들을 모두 소개시켜 감사가 그 마을에 도착한 후에는 텅빈마을만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행정의 손길이 미치기에는 지형적 조건으로 그다지 강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산청톨게이트를 지나 읍내를 빠져나와 15분 정도 지나니 간디학교에 다다렀다. 간디학교는 대안학교로 관제교육제도에 잘 적응이 안되거나, 부모의 교육관으로 선택되는 학교이다. 내가 알기로는 고등학교는 인가가 되었고 중학교는 인가가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간디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외송마을로 들어서야 한다. 산청은 지리산을 바로 옆에 하고 있기 때문에 산세가 무척이나 험했다. 가파른 언덕을 자동차 엔진이 터져라 올라가고 있는데, 간디학교 학생이 기숙사까지만 태워 달라고 했다. 학생들이 무척이나 예의에 밝고, 낯선 이방인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간디학교 학생들을 기숙사까지 태워주고는 다시 조금 내려와 우리의 목적지인 간디 생태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마누라에게 "여기 외송마을 자체가 생태 마을이네!" 라고 말했다. 오히려 간디 생태 마을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간디 생태 마을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단지 아직은 마을이 완전하게 조성되어 있지 않아 누런흙을 드러 내놓고 있고, 생태마을의 집들이 웬지 주변 자연환경과 부자연스러웠다. 내가 듣기로는 생태마을의 집들은 시멘트로 만드는 집들은 지을 수 없다고 말했다. 건축자재들은 황토를 제외하고는 거의 미국산 합판이었고, 집의 구조가 폐쇄식이었다. 나도 얼마전 까지는 한옥이라는 외형에 집착을 하였고, 집은 꼭 나무와 황토로 지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1월달에 다녀온 윤선도생가를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집은 외형과 재료도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어떤 삶이 이루어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축재료의 저공해성은 지금의 기술로도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고, 다양한 재료로 얼마든지 개성이 넘치는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 지역은 고속도로가 개통되기전까지는 하루에 올 수 없는 지역이라고 했다. 아직도 순박함이 마을사람들에게서 진하게 배어 나오는 것이다. 낯선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만으로도, 도시에서 느낄수 없는 정감이 다가왔다. 생태마을에 결정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돈이 있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생태마을로 완전히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업을 찾는다면 몰라도, 도시생활에서 쉽게 전원생활로 전환하기란 매우 힘들고 돈이 드는 일이다. 그래서 그곳에 이주한 사람들이 대부분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말하는 생태마을은 내가 보기에는 집밖에 놓인 생태화장실뿐이다.  나는 사람도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천지만물이 스스로 그러함을 이루듯이 우리의 인간사도 스스로 그러함을 찾아야 한다. 생태마을에 놓인 집의 구조는 영락없는 서구식, 특히 미국식 판자집이 그대로 옮겨와 있다. 현관문만이 외부와 내부가 출입되는 그러한 집이다. 집의 일부를 퇴마루나 대청같이 개방하고, 상식적인 높이의 담이 있고 안전한 마당이 있는, 그리고 그 흙담사이에 길이 있어 이웃이 있고, 마을에 공터와 마을입구의 장승이나 서낭이 있는 그러한 생태마을을 생각하고 답사에 임했던 나는 실망감이 앞서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날이 어두워 잠잘 곳을 찾기 위해 인근의 구멍가게에 들렀다. 거기에는 3년전 도시생활을 접고는 이곳에와서 그림같은 집을 짓고는 간디학교 학생을 상대로 심심풀이로 가게를 하고 있는 연세가 있어 보이는 점잖은 할머니가 있었다. 우리가 생태마을을 보러왔다고 하니깐, 간디학교 학생들의 품성과 생태마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고, 생태마을에 오면은 꼭 생태마을을 창안한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저녁식사와 잠자리를 알아봐 주었고, 식당겸 민박집으로 전화를 해주었다. 물론 민박은 공짜였다.  주인내외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고 없지만은, 식당의 방들을 손님이 원하면 그냥 내주었다. 저녁식사도 아주 정성을 들인 깨끗하고 말끔한 음식이었지만, 경상도 음식이 내 입에 맞지 않는지라 조금은 꺼려졌다. 그렇다고 주인내외가 정성들여 차린 음식을 맛이 없다고 안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된장국에 갯가재가 들어가고 미더덕이 들어가고, 하여간에 여태까지 내가 먹어보지 못한 것이다. 참고로 식당의 이름은 외송가든으로 간디학교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지역주민의 초등학교 동창회 관계로 시끄러울 것 같아, 잠자리는 다른곳을 찾기로 했다.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읍내로 나갔다. 다른 관광지와 다를바 없는 여관이었지만, 나는 항상 부탁한다. 옆방에 젊은남녀를 투숙시키지 말라고 꼭 부탁한다. 카운터 옆방이나 주인내외가 사는 방 옆을 택한다. 그래야 옆방의 괴성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 김성우, 역사비평사- 를 읽고 있는데, 결론 부분을 보고 있다. 전후 사족의 활동에 관한 함양지방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었다. 정말로 아쉽게도 산청을 갈때는 이부분의 챕터를 읽지 못하고 갔었다. 읽고 갔더라면 좀더 의미있는 답사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산청의 근방에 함양이라고 고속도로로는 7분거리에 있었다. 함양의 남계서원을 발단으로 경남우도의 북인이라고 불리는 사족집단이 정치귀족화하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곳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산세가 험해 전라도와는 영 딴판으로 경기지방과는 지역적으로 고립된 느낌마저 들었다. 직접 확인은 하지 못하였지만, 유서깊은 마을이 여러있고, 아직도 흙담을 이웃으로 사이길이 나있는 그러한 마을의 위치가 관광지도에 언뜻 보였다. 그러한 마을에 가서 조상들의 삶의 흔적을 찾아보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운 대목이었고,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산청으로 답사를 갈려고 한다.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여관주인 아주머니가 문익점 목화시배지와 성철스님의 생가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우리는 목화시배지에서 박물관을 둘러보고는 성철스님의 생가를 찾아가 보았다. 성철스님의 마지막 화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것이다. 산을 산의 모습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물을 물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내가 죽으면 절대로 사리를 채취하지 말하고 하셨다. 사리를 채취한다면 저승에서라도 가서 저주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성철스님이 입적하자 사리를 채취하였고, 이곳 생가 기념터에는 성철스님의 동상과 생가를 세웠다. 물론 그 주변은 이미 관광지로 변하였고, 모두들 성철스님의 동상앞에서 합장을 하고는 모두들 생가터를 둘러보았다. 함양지방답게 성철스님은 유학자 집안이었다. 출가를 하고서는 속세와의 인연,  부친과 생모 그리고 처와 자식의 정을 매정하게 단절한 분이었다. 특히 이곳은 조선시대 북인이라고 불리는 사족들의 세가 무척이나 강했던 곳이기에 성철스님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당시 거름뱅이 같았던 땡중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 탈춤에서 땡중이 비단옷에 붉은 장삼, 그리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한다. 이것이 당시 성철스님이 출가를 했을때,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눌린 불교의 현주소였다는 것이다. 지금의 절은 성철스님이 불교를 대개혁하면서 건전하게 만들었다.  중이 비단옷에 붉은 장삼을 거치면서 술과 고기, 그리고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예사였고, 죽은자의 장례와 여러 가지 무속적인 의식으로 나오는 돈으로 절의 살림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이 모든것을 금지하였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절의 재정을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홍기성
참고사진은 배움터 자료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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