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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과 윤선도생가에서
 홍기성 
| 2002·01·30 01:09 | 조회 : 4,482 |
두 아이와 처형네 가족하고 얼마전 해남여행을 다녀왔다. 2박3일의 빡빡한 일정속에서 모두들 지쳐있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장관을 이루는 서해대교를 지나 목포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첫날은 정읍을 들려 황토현을 둘러 보았다. 아직은 상업적인 관광코스로 개발이 되지 않아서 무척이나 인상이 깊었다. 당시 고부사람들의 삶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듯 하였다. 넓은 평야와 낮은 언덕아래 모여있는 다섯내지 여섯가구의 집들..... 적막감이 감도는 초저녁 눈이 내리는 가운데 황토현 전적기념비에 올라갔다. 그 근방에서는 제법 높은 위치에 있었고 황토현 벌판을 한 눈에 바라볼수 있었다. 황토현은 최초로 동학군이 관군과 싸워 이긴곳이다. 전적기념비에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除暴求民 保國安民 그런데 그 전적기념비에는 보국안민의 보자를 잘못 새겨놓은듯 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保(보전할 보)가 아니라 輔(도울 보)이다. 동학에서는 조선왕조는 운이 다한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保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외세침략에 대항하는 자주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輔를 썼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흔히들 우리가 일제에게 강점이 된 역사를 민족성에 두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총칼로 일제가 조선반도를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관료조직이 한반도의 구석구석까지 행정의 손길이 미쳤기 때문에 일제가 그 행정조직을 장악하면서 큰 저항없이 한반도를 접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지방에 군벌이나 중앙집권에 저항할 수 있는 막강한 호족들이 백성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이 없었고, 일본의 막부시대처럼 무력이 곧 지배집단이 되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었다. 조선은 철저히 文이 지배된 사회였다. 당시 세계정세의 흐름은 신분적 제억압이 와해되면서, 경제적관계만이 사람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서양의 과학과 만나면서 대량산업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전근대의 절대적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인류의 희망이기도 하였다. 서구유럽에서 자본주의는 그것이 비록 폭력적으로 행하여 졌지만, 그 바탕에는 신분적 제구속의 와해와 당시의 평등과 자유라는 그것을 바탕으로한 경제적관계가 인민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욕망의 최상이다. 조선은 이러한 세계정세를 수용할 수 있는 객관적요소를 지녔으면서도, 조선의 관료들은 결국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식민의 길로 들어섰다. 그것은 곧바로 우리 조선인민의 고통으로 돌아왔다.
황토현을 뒤로 하고 다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종착인 목포에 도착 저녁을 먹고 해남을 향해갔다. 관광지도라고 가져갔지만 국도의 번호와 위치가 잘못그려져있고, 새로운 길이 생겼는데도 관광지만 표시했지 증보를 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강진에서 민박을 찾으려니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여관을 들어갔더니 일행중 초등학생이 있어 교육상 문제가 되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박이 있는 해남으로 다시 차를 돌렸지만, 겨울에는 민박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결국은 해남의 희안한 여관에서 희안한 옆방의 괴성과 함께 첫날밤을 매우 후회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대둔사주변을 둘러보니 전라도 다운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유명사찰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주변은 온갖 유흥업소들 천지였다. 정말로 실망했다. 대둔사를 올라가는 길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나는 솔직히 절터는 크게 나에게 주는 느낌이 없다. 단지 아름답고 조용하다는 느낌과 나를 압도하는 대웅전의 건물과 탑, 불상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음은 윤선도생가에 가보았다. 나는 윤선도생가의 고택을 보고는 친숙함에 너무도 놀랐다. 인간적인 담높이와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정원 그리고 인간적인 집의 구조이었다. 절의 대웅전의 천정높이가 올려다 보면 오싹할정도로 높다. 그러나 윤선도생가의 집은 말 그대로 당시 양반들의 절제와 미학이 맞닫는 그러한 집이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집의 구조는 반 개방식이다. 문을 열면 바로 밖과 노출되는 퇴마루가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고있고 외부와 바로 노출되지 않게 뒤꿈치를 들면 살짝 안이 보이는 담이 둘러쳐져있다. 나는 사실 지금의 주택문화 아파트문화가 모두 인간적으로 디자인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의 모든 집의 구조가 폐쇄적인데도 불구하고 담이 둘러쳐져있다는 것이다. 현관문을 잠그면 도저히 그 집안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우리는 담을 높게 쌓고 있는 것이다. 담으로 인해 이웃과 공간적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담을 모두 허물고 나무를 심고 개구리주차식으로 주차장을 만든다면 동네가 한층 정겹게 그리고 이웃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적인 장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온돌문화이다. 그런데도 침대를 이용하고 있다. 한 겨울에 침대에서 자면 100퍼센트 감기에 걸린다. 그리고 좁다란 25평 아파트에서 침대를 놓고 소파를 놓으면 결국 남는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 안방이 식당도 되고 공부방도 되고 손님맞는 방도 되는 다목적인 방의 쓰임에 익숙한 우리에게 청결하고 위생적이고 건강에 좋은 면으로 된 요와 이불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작은 평수에 사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입식이 나쁜것은 아니다. 사실 편하고 좋지만 나같은 서민은 큰평수로 당장 옮길 수 없기에 이러한 생활방식을 택하고 있다.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키우기란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무턱대고 아이들을 밖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아이들의 친구들을 매일 불러서 놀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퇴마루와 담이라는 우리의 전통적인 집에서 영감이 떠올랐다. 아파트도 일정부분 베란다로 들어가는 평수의 일부나 전부를 반개방식으로 하여, 아이들이 놀러와도 굳이 집안으로 불러들이지 않고도 놀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이웃끼리도 부담없이 서로 왕래를 할 수 있어 이웃과의 정감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서민들을 위한 아파트나 주택도 그들 스스로 자부심과 긍지를 갖을 수 있는 그러한 디자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 중 성공하는 사람은 3%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3%의 사람들만이 좋은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작지만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동네, 마을이 있다면 그만이다. 세계화나 대규모의 조직이나 생산 유통에서 소외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정신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나는 인간이 가장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수 있는 방법은 마을공동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비록 도시는 각자의 경제가 개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강하게 결속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최소한 문화공동체는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열한 경쟁속에서 내가 뒤쳐지는 모습에 스트레스를 받는것보다는 서로돕는 삶속에서 자긍심과 보람을 느끼는 삶이 우리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비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절제와 미학이 만나는 조선사림의 생활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내가 비록 부가 없고 명예가 없더라도 내 삶에 자긍심이 있다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뒤받침해줄 수 있는 모든 문화가 새롭게 디자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거환경의 구조는 물론이고 작게는 풍물 또한 여기에 맞게 새롭게 디자인되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윤선도 생가를 둘러보고는 곧바로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배처를 방문하였다. 강진에서 그리멀지 않은 곳이었다. 희안하게도 해남이나 강진주변은 윤씨 일가의 비문과 묘지가 많이있다. 아마 이지역에 호세한 성씨중에 하나인 것 같다. 정다산유배처를 올라가면 아담한 기와한옥이 세워져 있다. 안내문에는 후손들과 기념회에서 최근에 세운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허름한 초가가 있었다고 한다. 여행객들은 집을 보고 곧바로 만이 보이는 정자에 올라가 경치에 감탄을 하지만, 나는 최근에 세워진 기와집의 마루에 앉아 보았다. 숲의 나무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답답하기만 하였다. 옛날에는 이보다도 숲이 우거졌을 것이다. 참고로 정다산선생은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정다산선생의 생애에 대해 크게 아는바가 없어 더이상의 상상은 하지 않았다. 나는 건물을 볼 때,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먼저본다. 현관바닥에 깔려있는 이태리산 대리석이 무엇이 그리도 우리삶에 중요한지 아파트모델하우스 직원들이 강조를 한다. 건물의 선이 어떻고 어떤 포인트가 있고 등등... 이러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건물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황토현전적기념비에 올라 황토현을 바라보면서 나는 당시 우리조상들이 살았던 삶들을 상상해보았다. 5가구정도가 한데 모여있으면서 그러한 취락들이 일정지역을 포섭하여 마을이 된다. 마을안을 들여다 보면은 농업생산력의 저수준을 소농경영의 집약적농업으로 극복하였고, 노비제가 와해되면서 호세한 양반이나 토호(노비제나 협호들의 노동에 의한 조방적인 농업생산)들은 농업생산에 차질이 생기면서 마을공민이 주축이 되는 두레에 자신들의 토지를 분활을 요구받게 되었다. 당시의 조세와 군역 또한 마을공민이 공동으로 부담하였다. 녹두장군의 아버지가 마을대표로 세를 감면해달라고 요청하자, 조병갑이 오히려 잡아들여 모진 고문을 하였다고 한다. 16세기 이후 사림이 중앙에 진출하여 중앙집권과 향권자치의 긴장속에서 향촌의 지배와 영향력을 마을공민에게 행사하였다. 이러한 사림의 향권장악이 조선후기에 가면서 사회경제적 처지가 향상된 마을공민이 향권을 장악하여 마을공동체의 기반을 더욱 다지게 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은 동학의 조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실제의 우리의 삶인 마을공동체가 이처럼 사회경제적 위치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조선후기 말기에 가면은 양반이 70%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자기 조상중에 양반이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중문화는 솔직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같은 시대의 문화만이 있을 뿐이고, 그러한 문화를 서서히 보편화 시키는 것 뿐이다. 양반문화도 조선왕조후기에 가면은 일반백성들에게도 보편화되었을 것이다. 마을마다 서당이 있어 초등교육을 담당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서당선생이었다. 관혼상제등 모든 문화나 그 밖에 모든 인문적 교양이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장시의 발달과 광공업의 발달은 굳이 농사일로 목을 매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마을민의 입속과 탈락은 매우 빈번하였다고 생각한다. 마을공동체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매우 개방적으로 운영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레의 계원의 자격심사와 선별 그리고 탈락과 분배 이 모든 것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사실은 신분적인 억압관계가 사라지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한층 높인 동등한 마을공민들 사이에 합리적인 경제적 관계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였다. 우리조상들의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자본주의로 급속히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고 생각한다.
황토현은 나의 머리속에 정리되었던 형이상학과 황토현이 내뿜는 형이하학이 만나는 자리였다. 그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나의 생각들을 확신하게 되었다. 윤선도생가에서 준 나의 영감도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했던 삶의 구조와 맞닫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절제와 미학은 앞으로 나의 모든 생활에 기본이 되리라 다짐하였다. 나는 내 후손에게 길이 남길 집을 구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절제의 미학에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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