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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굿에 대하여(4)
 홍기성 
| 2001·09·30 00:32 | 조회 : 4,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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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굿에 대하여(4)
"현대영어에 있어서 임뮤니티란 주로 인체의 면역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바로 면역학(immunology)의 주제가 되는 것이며, 바로 안티젠(antigen)으로 설정되는 외물질에 대한 우리 몸의 저항체계를 말한다. 그런데 이 임뮤니티를 "면역(免疫)"이라고 번역한 동서문명교류의 깊은 사려를 한번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역(疫,질병)은 고자(古字)에 있어서 역(役,요역)과 상통한다. 즉 우리몸의 면역(免疫)이나 어느 공동체의 면역(免役)이나 사실 알고보면 동일한 인간학적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역(役,요역)이란 것은 역(疫,역질)만큼이나 우리존재에게서 외적(外的)인 것이며 지겨운 것이며 신물나는 것이다. 병역에 묶여 고생하는 젊은이들의 "신물"을 생각하면 역질(疫疾)에 고생하는 세브란스병동의 환자의 신물남과 동일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기에 면역(免疫)과 면역(免役)이 동일한 글자로 성립된 것이다. 그렇게 신물나는 역으로부터 임뮨되는(면제되는) 상황이야말로 인간의 건강이며 인간의 자유며 인간의 소망일 것이다." -[노자철학 이것이다] p328~p329, 통나무, 도올 김용옥-

얼마전 나는 주차위반과 신호위반으로 한달내 구실세금(租稅)을 무려 12만원이나 냈다. 주차단속이 하도 심하니깐 온갖 차들이 전부 주택가로 몰려들어 집 주위에는 차를 둘 곳이 없다. 그래서 잠시 길가에 주차하는 동안 주차딱지를 붙이는 동시에 견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원에서 월드컵이 열린다. 경찰들이 월드컵행사때에 외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위한 기초질서를 바로 잡겠다고 대대적 단속을 벌이면서 신호등과 무려 이백오십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의경들이 함정 단속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신호등이 가물가물 보이는 곳에서 말이다. 나는 내 양심에 말하는데 결코 신호위반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온갖 세금들, 적십자회비 오만원 휘발유와 경유값에 붙은 세금. 예나 지금이나 세금에 시달린다. 그리고 분리수거를 잘못했다고 한 지역을 모두 3일동안 쓰레기를 거두어가지 않았다. 축구장 입장권을 사라고 동사무소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확성기로 나발을 불고.... 놀이터 미끄럼틀을 업자들이 교체하고는 몇일 후 공무원이 와서는 사진을 찍어가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저렇게 엉터리로 시공을 하면 몇 일 못가서 망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무원이 공사확인을 하고 정확히 삼일 후 못이 튀어나오면서 미끄럼틀이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지금은 찌그러지고 단단하게 고정되지 못해 미끄럼틀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공원잔디밭에 들어갔다가 경을 쳤다. 잔디밭은 행사때만 밟고 다니라는 일용직 아줌마의 괴성에 화가나 몇 마디 했더니 시청에 가서 따지라는 것이다. 주민을 위한 공원이 거의 대부분이 유료로 이루어지는 음악회에만 개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저런것들을 생각하면 정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현대사회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내려와 있는 민주국가이다. 주권이 왕에게 있었던 전근대사회에는 이러한 공권력의 폭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오죽하면 면역(免疫)을 면역(免役)과 동일하게 썼겠는가! 인간의 역사는 마을의 역사이다. 가족을 제외하고 인간이 무리짓는 방식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단위는 바로 마을이었다. 이러한 마을이 파괴된 역사는 바로 새마을운동이었다. 값싼노동력을 얻기위해 농촌을 파괴하여 사람들을 도시로 내몰았던 역사적 사건이다. 도시에서 성공했다고 농촌에 와서 폼재는 인간이 되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얻은 물질적 포만감은 그리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농촌이 비참하게 파괴된 나라도 드물 것이다. 나는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유럽의 농촌마을이 수세기동안 자기들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사는 것을 보았다. 어느 거대한 교향곡이 탄생한 음악가의 마을은 아직도 그러한 기풍을 사람들이 가지고 살고 있었다. 유럽의 관광문화는 바로 이러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의 체험일 것이다. 우리의 관광문화는 정말로 한심할 지경이다. 명소라고 해봐야 떵그러니 안내문만 있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프라이드 있는 삶은 볼 수가 없다.
마을공동체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고 집권에 따른 공권력의 폭력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유지시켜주는 그러한 구조였다. 한 예로 조선시대에는 성씨(姓氏)마을이 많이 산재하였다. 내가 살던 마을도 성씨마을로 마을입구에는 커다란 노송숲이 있었고, 마을길에는 잡초들이 보기좋게 깍여 있었던 곳이었다. 지금은 온갖 잡초들이 길을 넘어서고 있고 노송숲은 자동차 정비공장이 들어서고,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아있다. 농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위탁경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마을은 동족(同族)마을로서 윗마을에는 전통적인 양반정착지였고, 중간에 위치한 우리 성씨들은 상민(常民)으로써 조선후기에 정착한 시조(始祖)에 의해 가꾸어진 결속이 잘된 성씨마을공동체이었다. 윗마을보다는 부유한 마을이었다. 오히려 윗동네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스스로 양반이라는 했고, 마을 어귀에는 우리마을의 위풍당당한 노송숲이 위엄을 자리했다. 그리고 아랫마을은 외지인들의 집촌으로 우리마을의 소작이나 품을 팔면서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때까지만 해도 우리마을은 길이 잘 닦여 있었고, 마을 어디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지 않았다. 잘 정돈된 마을이었다. 조선시대의 성씨마을은 농업생산을 보장해주는 공동체였으며, 중앙의 공권력에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였다. 마을공동체내의 주호(主戶)-협호(挾戶)의 관계도 결국은 농업경영의 재순환의 보장과 가혹한 조세수취에 대항하는 조선민중들의 자위적인 행위였다. 조선후기에 가면서, 시기 말하면 18세기 중반부터 신분제의 급속한 와해는 농업생산력의 저발전에 따른 인신적 지배에 의한 주호의 농업경영이 해체되는 시기였다. 이앙법의 발전과 보급은 노동력을 십분의 일로 줄였다고 한다. 그러한 노동력의 절감으로 영세농업경영인들이 경영을 확대할 수 있었고, 주호에 매몰되어있던 협호(그 자신이 노비이거나, 혹은 가혹한 조세수취에 유망되어 호세한 토호나 양반에게 포섭되되는 것, 가혹한 조세수취와 농업의 재생산에 필요한 보통의 친족의 불법적(不法的) 합가(合家), 일반 농민경영상 나타나는 합가 등 이 모든 것이 바로 농업의 재생산과 국가의 가혹한 조세수취에 대항하기 위한 자위적인 것들이다.)들이 경영을 확대해나가면서 마을의 공민으로써 사회경제적 지위를 획득해가는 과정이 바로 조선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마을공동체의 특징이다. 조선후기에서 나타나는 조세의 공동납은 이러한 인신적 혹은 인격적 예속을 동반한 주호-협호관계들이 수평적 관계들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상하군민이 균일하게 전을 내어서 조세를 공동으로 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납이 행하여 진 시대에는 지방의 목사들도 마을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공동납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선생도 마을공민들이 백골로 군역을 허록(虛錄)하고 공동납(共同納)을 하고 있는데, 굳이 이것을 조사하여 어지럽히지 말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바로 이것이 균역법의 시행과 같다고 했다. 당시 군역은 마을의 상하공민들이 모두 전을 내어서 군역을 치루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조세수취는 중앙에서 호총(각 고을에서 올려 보낸 호적을 토대로 호총(戶總)을 정하였다. 호적에는 역을 감당할만한 호를 기준으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왕조가 파악한 자연호(自然戶)이다. 조선후기 이전에는 협호(挾戶)의 호적기재는 역을 감당할 수 없어 곧 유망하였다. 호패법은 모두 사람에게 패를 주어 모든 호와 구를 파악하겠다는 것이지만 곧 폐지되고 말았다.)과 결수(부정기적으로 양전사업을 실시하였다.)를 정하여 각 지방에 내려보내고 군수는 각 고을로 호총(戶總)과 결(結)을 나누고 고을의 수령은 자신이 파악한 호적(戶籍)과 비교하여 세(稅)를 부과하였던 것이다. 특히 군역(軍役)은 한번 정해진 호총에 의해 매년 부과되기 때문에 군현(郡縣)이 통합되거나 분리될 때, 호구(戶口)가 환추(還追)되지 않을 경우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과중한 역(役)이 부과되기도 했다. 지역에 흉년이 들 때면 군수나 수령은 상소를 올려 조세와 군역을 감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세수취와 호구파악의 기술적 미약으로 당시 조선민중들은 불법적인 합가(혈연합가, 접계합가, 비혈연합가의 형태)나 호세한 양반이나 토호들의 울타리로 들어가 가혹한 조세수취에 소극적으로 저항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호-협호의 형태는 당시 농업생산력의 저수준에 의한 기간적(基幹的)인 농업경영형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호-협호 경영은 인신적 인격적 예속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서구의 봉건제처럼 농노적 농민의 형태는 아니었다.   
황구첨정은 16세미만의 청소년에게 군역을 지게 하는 것이다. 첩징(疊徵) 또한 한 사람에게 세네사람의 역이 부과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사회적 제반현상으로 주호만이 호적에 등록되어 있는 호구조사의 관습과 호총(戶總)의 저수준에 기인한 것이다. 주호에 혈연이든 비혈연이든 호(戶)나 구(口)가 합가(合家)되어 있는 상태에서 조선후기로 가면서 협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의 향상으로 주호만이 감당해 낼 수 있었던 역을 협호들이 지게 되는 것으로 첩징은 바로 이러한 협호들이 역을 지는 것이다. 황구첨정 또한 많은 부분이 역리라는 세습되는 역에 집중되어 있고 또한 협호들이 역을 부담하는 수준에서 이해를 한다고 [조선후기 사회경제사]를 쓴 이영훈교수는 말한다. 군역은 이시기에 오면 고립제가 되어서 포나 전으로 내면 되었다. 대동법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주호의 경영에 매몰되어 있던 협호들이 자립적 소농경영으로 자리를 잡으므로써 조세의 균등화가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대원군이 시도를 하였던 호포제(戶布制) 또한 조선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상승에 따른 균일한 조세제도인 것이다. 호당 호세(戶稅)를 균일하게 하여 거두는 것으로 자립적인 소농경영의 안정 없이는 시행될 수 없는 제도인 것이다.
조선은 중앙집권으로 서구의 봉건제와 같이 분권화되어 모든 사법권 경제권 군사권 외교권이 독립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는 지방세력화된 토호나 양반들을 끊임없이 견제하여 그들의 성장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방세력들이 분해되어가면서 균질화되는 과정이었다. 간혹 호세한 양반이나 토호들이 대규모지주적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이 체제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왕이 있고 백성만이 있는 것이다.
풍물굿의 모습은 우리조선민중의 삶속에서 의미있게 해석해야 한다. 옛것이 옛것으로 존중되기 위해서는 지금에 있어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전통문화도 대량생산과 소비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할 때, 우리에게 옛것으로 옛것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동네에도 십수년전까지만 해도 풍물굿이 미약하게나마 존재하였다. 마을에 상쇠아저씨가 있었고 아직도 상여계가 남아있다. 그리고 상여를 두는 곳에는 어김없이 풍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 상징되는 수백년 묶은 고목이 자리를 잡았고, 최근까지만 해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산제사가 있었다. 마을에서 소를 돌아가며 기르면서 제사를 지낼 몇일전에는 모든 마을주민들이 금욕생활을 하고는 당일날에 소를 잡아 제사를 올리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고기를 먹고 콩국수를 말아먹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듯 잘 결속된 성씨마을공동체가 지금은 완전히 해체가 되었다. 우리 작은할아버지가 매년 겨울이 되면 동네청년을 지휘하면서 노루를 잡던 호탕한 그 기세는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쓸쓸히 말년을 보내고 계신다. 내가 조선시대 제도사를 공부하면서 내 마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이땅의 의미가 내 앞에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우리는 농촌을 살려야 하고 도시의 삶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주차문제나 교통문제등 중앙공권력의 지긋지긋한 간섭과 단속에서 우리(마을공동체)가 해결하자(담을 헐고 주차장 확보, 주차방식개선지도). 구실세금이 정말로 한달에 십만원 꼴이다. 못 살겠다! 아니 살아야 한다! 육아문제도 해결하자(공동 육아). 최소한의 유아교육도 해결하자. 환경문제 해결하자(분리수거). 방과후 학생지도 해결하자. 마을굿을 시작하자. 계들 만들어 경조사를 치루자. 없고 병든사람을 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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