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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굿에 대하여(3)
 홍기성 
| 2001·08·11 00:01 | 조회 : 4,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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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굿에 대하여(3)
우선 풍물굿에 대하여 (1) (2)편에서 잘못되거나 설명이 부족한 것을 먼저 이야기 하겠다. 사실 문제가 많은 글이다. 내가 그렇게 글을 쓰는 의도는 자칫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나의 생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하여 조선시대 제도사를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고 싶어서 였는데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경북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이호철교수의 책(조선전기 농업경제사, 한길사)에서 조선전기에는 노비의 집단협업노동으로 직영되는 농장이 당시 사회적 생산력의 중추에 있었다고 했다. 나는 이 설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호철교수의 논문에서 당시(조선전기)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사직설의 단계로 노동생산력에 크게 의존하는 상대적으로(조선후기로 내려갈수록)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조방적인 농업생산이었다는 것과, 이 시기는 휴한농법이 극복되는 과도기적 단계로 조선후기와 같이 자영소농경영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이고 지배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농민들의 유망은 농업생산력의 한계도 있었지만 국가적 수취체계의 가혹성도 유망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이영훈교수(한신대학교 경제학과)는 노비에 의한 집단협업을 통한 직영지적 성격의 농장이 아니라, 실제는 주가(主戶)에 딸린 많은 挾戶(협호)들이 주가의 토지를 소농경영형태의 경영으로 존재하던 것이 바로 농장(農場)이라는 것이다(서구의 봉건제도 영주의 영지에 농민들을 경제외적강제로 사적(私的) 예속하였다. 서구 봉건제하의 농민의 경영형태도 소농경영의 형태였다.). 이영훈교수는 이러한 주호경영이 조선후기까지 지속해온 농업생산력의 실체라고 한다. 조선은 兩賤(양천)이라는 신분에서 마지막으로 노비가 해방이 되는 단계였다. 이러한 사회적 신분의 변동과 집약농업의 발달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발달은 주호경영이 점차 해체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주호경영에 의한 지주(地主)의 농업경영이 점차 축소되어가고 상대적으로 영세한 소농경영이 점차 안정적으로 확대해가는 과정이었다. 지주가 自家 한도내에서 경영규모를 축소시키고 나머지의 토지를 소작으로 방출하는 그런 형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시 소작농이라 하더라도 상층농업경영의 규모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안정적 소농경영의 성립은 마을공동체를 수평적 결속이 가능케 하였고 장시를 발달하게 된 배경이었다. 나의 사견으로는 고대로 올라갈수록 경제적 부의 축적은 인신적 구속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자립적 소농경영의 광범위한 분포는 인신적 구속력의 제사회적 억압구조가 무너지는 사태에서 이루지는 보다 개방적인 경제구조의 성립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협호(挾戶)를 이영훈교수는 당시 농업경영의 한 형태로서 戶내에 비인격적 비인신적 구조가 존재하였다고 했다. 당시 조선후기 이전에는 조선왕조가 파악하지 못했던 광범위한 유민이 존재하였고 이들이 협호로 존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러한 유민(流民)들은 국가의 가혹한 조세수취와 부역으로부터 도피하는 소극적 무리였을 것이다. 이러한 협호들은 도적의 무리가 되거나 부호한 양반이나 토호들에게 투탁(投托)하여 가혹한 조세수취를 벗어나려고 했다. 또한 유민들이 떠돌다가 어느 마을에 경제적으로 부호한 호(戶)에게 포섭되기도 했다.
이러한 합호(合戶)의 형식은 국가에서 변방으로 이주를 하거나 전공을 세우면 三家가 하나의 戶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조세수취는 결부제로서 결당 수취량이 결정되기 때문에 수취상 잔호(殘戶)들이 편제되어 合戶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호라는 것은 지금의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단혼소가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는 농업생산력이 토지생산성보다는 인구밀도가 낮은 상대적으로 넓은 토지에 조방적인 노동생산성위주의 농업이었다. 또한 양반세력가나 토호들은 자신의 경작지에 노비와 유민을 포섭하여 소농경영을 하였다. 그래서 지주들의 땅은 한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분산되었고 분산된 땅들은 영세하였다. 주호의 농업경영의 방식은 진보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다. 솔거노비나 외거노비(고려말과 조선전기의 노비는 전인구의 삼분의 일이었다. 토호나 세력가들의 농장은 이러한 노비의 소농경영에 의해 이루어졌다. 원래적 의미에서 협호는 이러한 노비들의 소농경영의 형태이다.) 그리고 유민을 포섭한 협호들에 의한 소농경영이었다.  이영훈교수는 이러한 농업경영상 특징이 당시의 조세수취과정에서 合戶를 가능케했던 배경이라고 했다. 이러한 협호들이 조선후기에 들어서 집약농업의 발달로 안정적 정착이 가능하였고, 유민(流民)의 처지에서 한층 안정된 마을민으로서 존재하였다고 한다. 대동법이나 호포제등이 바로 이러한 소농경영의 안정을 바탕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후기에 널리 열린 장시도 이러한 소농경영의 안정적 바탕위에서 성립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시풍속도 알고보면 과거 귀족들의 놀이였다. 경제를 끝낸 자들의 문화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의 달성은 인신지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문화도 어떻게 보면 노비를 부림으로써 얻어지는 경제적 부와 생활상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가 1990년대 중산층이라는 이야기를 우리자신에게 많이 했다. 거품경제로 이룬 반짝 쇼였지만 실지로 많은 경제적 부가 우리에게 돌아왔음은 사실이다. 조선후기에 전 인구의 양반이 70~80퍼센트였다는 것은 이미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다. 제반 잡역을 피하기 위하여 향리(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향리들의 부정부패를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도덕적 품성을 강조하고 향리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향리들의 부정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구조 즉 그들이 봉급이 없다는 것과 세습된다는 것에 대한 문제는 일절 말이 없다.)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돈을 주고 호적을 고치거나 사는 방법으로 賤役(천역)을 피하고 좀더 나은 職役(직역)을 받을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후기로 가면서 조선민중들의 삶이 보다 향상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을 저급하게만 본다면 탈춤에서 나오는 온갖 양반들의 추태와 같은 양태로 볼 수 있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볼 수가 없다. 탈춤에서 나오는 양반들의 추태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민중자신이다. 우리의 언어속에 이 양반 저 양반 하는 것으로 보아도 양반이라는 말이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탈춤에서 양반과장이 양반행세를 하면서 온갖 양반들이 가지는 저속함을 따라 할려는 자들에의 경종이라 한다면, 바로 탈춤은 조선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말단공무원격인 관아의 이속(향리)들이 주체가 되었다. 양순용선생님은 탈춤을 모르신다(물론 양순용선생님의 현역시절과 탈춤이 성행하던 시기가 서로 다르지만). 대학생들이 와서 탈춤이 있다고 해서 탈춤이 있는 것을 알았다. 양순용선생님은 탈춤을 잡색놀이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비약해서 우리가 탈춤이 갖는 비판정신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아닐런지 모른다. 정말로 고민해야 될 부분이다. 1990년 5월24일 전주 우석대에서 발표한 도둑잽이굿의 대본을 보자(본 홈페이지 자료마당 참조). 잡색놀이가 탈춤의 원형이 되는 듯이 보인다. 관아의 이속들이 주축이 되어서 연희되는 탈춤이 과연 지방수령과 세력가양반들을 앞에 두고는 양반을 저속하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탈춤이 체제 비판적이라고 하는데, 대본을 보면 어디하나 그러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저속한 조롱과 비웃음일 뿐이다. 그리고 파계한 중을 등장시켜서 조롱을 하는데, 불교가 당시에 그토록 해악을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납득이 가지 않는 장면이다.

지금 우리는 상식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怪力亂神(괴력난신)을 여기저기서 보고 있다. 삼국유사 첫머리 紀異편 "敍曰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대저 옛날 성인이 바야흐로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교화를 베풀되 괴력난신은 말하지 않았다.) 에서도 괴력난신은 말하지 않았다. 괴력난신은 굉한 勇力과 悖亂(悖, 어지러울 패) 그리고 귀신을 말한다. 제 2의 산업혁명이라는 IT분야에 있는 모 후배가 탈신이 깃든나무의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 순간 충격을 받았다. 탈신이 탈마당에서 언제 나무로 이사를 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인간이라는 것이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상식의 세계에 살고 있다. 고대로 올라가면 순장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권력자들이 사후의 삶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생명을 빼앗았던 것이다. 孔子의 제자인 子夏의 계열에 있었던 西門豹(서문표)의 하백의 미신타파 일화에서도 보듯이 우리의 문명은 상식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열린마당게시판 [논어 제18강 "여인과 현인"중에서). 서문표가 업이라는 지방의 군수로 가게 되었는데, 관속과 토호들이 황하의 물귀신에게 매년 살아있는 처녀를 바치면서 주변 마을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었다. 이에 서문표는 물귀신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라고 하면서 무당과 그의 제자들과 삼노를 차례로 물에 빠뜨리면서 관속과 호장들을 위협하여 그러한 관습을 없애고 황하의 범람주변에 댐을 쌓았다는 이야기다.   

부모님께 효를 극진히 하오며, 하인을 내 자식과 같이 여기며, 육축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꺽지말며, 부모님 분노하시거든 성품을 거슬리지 말며 웃고 어린자식 치지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 천리를 모르고 일행 아이를 치면 그 아이가 곧 죽을 것이니 부디 집 안에 큰 소리를 내지 말고 화순하기만 힘쓰옵소서. 이같이 한울님을 공경하고 효성하오면 한울님이 좋아하시고 복을 주시나니, 부디 한울님을 극진히 공경하옵소서 ..... 먹던 밥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 새국에 섞지말고, 먹던 침채 새 침채에 섞지말고, 먹던 반찬 새 반찬에 섞지 말고, 먹던 밥과 국과 침채와 장과 반찬등절은 따로 두었다가 시장하거든 먹되, 고하지 말고 그저 '먹습니다' 하옵소서. ..... 금난 그릇에 먹지말고, 이 빠진 그릇에 먹지 말고, 살생하지 말고, 삼시를 부모님 제사와 같이 받드옵소서. ........ 이 칠조목을 하나도 잊지말고 매매사사를 다 한울님께 고하오면, 병과 윤감을 아니하고 악질과 장학을 아니하오며, 별복과 초학을 아니하오며, 간질과 풍병이라도 다 나으리니, 부디 정성하고 공경하고 믿어 하옵소서. 병도 나으려니와 위선 대도를 속히 통할 것이니 그리알고 진심 봉행하옵소서." -해월신사법설 中 內修道文에서-

동학에서는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매우 상식적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순장이나 서문표의 하백의 미신타파와 같은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사회구조였던 것 같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聖人(성인)이라는 말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예언을 잘하고 점을 잘치는 자들을 말하며, 이러한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바로 제정일치시대의 모습이다. 조선말 동학이 말하는 상식적인 말들이 지금에와서는 무척이나 유치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어떠한 절실함(중화(중국)의 붕괴와 서구문명의 소개,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 만연한 전염병등)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주들인 양반세력가들과 토호들의 낡은 생산력, 즉 노비와 다수의 협호에 의한 주호경영이 신분관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조선후기 말기에 와서 인신적 구속력이 사라진 보다 자유로운 경제관계로 해체되었고, 농업생산력(집약농법발전)의 발전은 낮은 농업생산력과 국가의 가혹한 수취체제에 끊임없이 유망해야 했던 협호들이 소농경영의 안정성을 확보였고 그러한 안정성의 바탕에 장시가 전국적으로 열리면서 보다 확대된 경제활동(상업 공업 광업)이 생기게 되었다. 인신적 구속력이 점차 배제되는 경제적 관계들이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경제사를 뚫는 보편사라고 생각한다. 물론 학자적 자질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구구절절이 사회과학에서 소농경영이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전근대적인 농업경영의 형태라고 말하면서 소농경영의 有無로 그 나라의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다 없다를 점치고 있지만, 왜 자립적소농경영의 보편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못했다. [도올논어]를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의 욕망(慾望)의 확대"라고 이해했다. 그래야 국가의 형성과 기원 그리고 사회제반구조의 변화등이 설명이 되었다.

마을에서 성행하던 契(계)는 분명 경제적 관계이다. 인신적 예속이 있는 경제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인간들의 경제적 관계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경제적 관계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까지 확대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의 계를 보면은 단순히 금전적인 관계만은 아니다.
관아의 이속들이 마을 성황당을 주재([관아 이야기] 둘째권, 사계절, 안길성 지음) 하면서 마을을 지배하기 위한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면, 마을굿은 마을민들의 수평적 제관계속에서 나오는 신명이다.

양순용선생님이 좌도풍물은 마을굿임을 강조하면서 무속과는 다르다고 항상 강조하셨다. 풍물이 주는 신명은 수평적 관계의 인간들의 공동체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무속에서의 귀신과 인간의 관계는 결코 수평적일 수 없다. 그것은 수직적 관계이고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일방적인 관계이다. 좌도굿에서의 조왕신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시대의 가옥구조는 거실과 부엌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지금과 같이 거실의 중앙에 위치하지 않았던 구조였다. 거실과 부엌이 분리된 불편한 구조속에서 조선의 며느리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시집살이를 하였는가를 생각해보자. 조왕신은 바로 불편한 구조를 지닌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말한다. 조왕신은 호랑이들 타고 있는 무서운 산신할아버지가 아니요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삶이다. 우리 조선의 여인들이다.

대포수나 창부가 솥뚜껑을 거꾸로 세워들고 그 위에 대주식기에 쌍을 가득 담아 촛불을 꽂고 다시 이것을 솥위에 올려 놓는다. 정지굿의 진행은 "갱 갱 갱/갱 갱 갱"이라는 참굿가락을 치면서 부엌에 들어가 솥 위에 차려있는 고사상에 절을 세 번한다. 절굿이 끝나면 상쇠는 "화동"이라 부르며 모든 치배들은 "예히"라 크게 대답한다. 대답이 끝나면 상쇠는 집주인을 위하여 덕담을 걸판지게(재미있게)해 준다.
덕담은 덕담자가 즉흥적으로 하는데 필봉리의 상쇠 양순용선생님의 덕담을 간단히 빌리자면
"아 이 집이 아무게 집인데, 옛부터 이르기를 바깥차지는 대주차지요. 안방차지는 조왕차진데 말이야 이 집 대주님, 안방님, 식솔 모두 다 일년 열두달 삼백육십오일 물묻은 바가지 깨달라 붙듯이 복많이 충만하시고 나쁜 액들이 있거늘랑 저 섬진강물에 내던져 버리고 좋은 것만 충만하라" 는 덕담을 한다. -조왕굿 中에서-

우리는 여기서 전혀 괴력난신을 볼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나오는 삶일 뿐이다. 진실은 화려한 겉모습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소박함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 풍물의 진실은 바로 위의 조왕굿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풍물이 지향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양순용선생님도 풍물은 화합이 우선이라고 하셨다. 풍물은 가락의 장단에 따른 감각적 황홀감이 아니다.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지금 우리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다. 동아리방에서 눈을 까집고 정열적으로 치는 설장고나, 동승동 젊은이들의 광란의 춤이나 무엇이 다르겠느냐 말이다. 학교내 다른 풍물패들이 기량이 뛰어나서 중앙동아리로서 위상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까짓 기량이야 좋을때가 있고 나쁠때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각각의 재능에 따라 달라진다. 학교내 풍물패 확대라는 당시 선후배들의 풍물을 다시 보고자했던 생각과 실천이 학교내 모든 풍물패와 다른 문화패를 민연에 묶어 둘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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