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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굿에 대하여 (1)
 홍기성 
  | 2001·07·15 17:53 | 조회 : 4,949 |
86년 양순용선생님에게 처음으로 풍물이라는 것을 배웠다. 내 평생의 위대한 스승은 바로 양순용 선생님이었다. 농사일 틈틈히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은, 세속에 찌들어 있는 다른 문화전수자들처럼 온갖 잡기에 능하지도 못했다. 성실한 농사꾼의 모습 그대로의 모습이다. 살아 계실적에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머리가 깨이니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풍물이 갖는 공동체적 의미를 명확히 밝혀야 겠다는 것이 재학생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지만, 먹고살기에 바빠 제대로 생각도 해보지를 못했다. 내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배기지를 못하였다. 나 스스로 2000년 10월에 나의 작은 생각들이 담긴 글을 쓸려고 했지만, 그것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내 동기와 풍물로 세상이 되집어 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물론 서로 의미하는 바는 다를 수도 있었지만, 나는 풍물이 갖는 공동체적 의미를 우리시대에 다시 재해석해야 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지금시대에 남북철도가 연결되어 시베리아 횡단철도 시대가 열리는 판인데, 지금에 와서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공동체적 삶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공동체적 삶속에서 개개의 인간의 삶이 존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검증된것은 아니지만 마을굿은 적어도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전, 즉 박통에 의한 경제개발이 시작되기전까지는 최소한 명맥을 잇고 발전되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86년도 풍물 겨울전수때 남원에서 연습을 하고 있으면, 간간이 멀리서 중년의 아저씨들이 찾아와서는 같이 어울리곤 하였다. 마을굿에 경험이 있는 분들이었다. 양순용선생님은 한 배를 그토록 강조를 하셨다. 풍물의 맛은 화려한 가락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한 가락을 정확히 한 배에 맞추어 절도 있게 쳐야 한다. 그리고 진풀이도 상쇠의 지휘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맞추어야 한다. 최근에 와서 풍물의 가락이 무대화되고 사물놀이화되어 잡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가락은 간단해야 한다. 풍물의 맛은 미친듯이 머리를 흔들며 눈깔의 흰자위가 보이도록 숨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닥이 없는 가락으로 깨끗하게 절도있게 치면서 절도있는 춤사위(염풍대)로 상쇠의 지휘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풍물의 멋이요 맛이다.
양순용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는 풍물을 당집이나 상여두는 곳에 두어 마을 사람들이 함부로 꺼내어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간혹 동네 아이들이 꺼내 치면 어른들이 혼을 냈다고 한다. 노래와 춤이 지나치게 되면 일상생활에 커다란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풍물도 마찬가지로 잡기라고 생각한다. 우리 후배들이 연습시간을 줄이는 것을 가끔씩 볼때, 솔직히 매우 반긴다. 풍물은 한배만 정확히 하면된다. 가락도 되도록 원박만 치고, 기닥은 생략하고, 장고의 춤은 연풍대로 한정해야 한다. 기술적인 설장고를 익히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풍물의 뜻을 잘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풍물을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풍물이 원래 상쇠놀음이라고 생각한다. 상쇠의 지휘로 풍물패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은 풍물굿을 올리는데 매우 능률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상쇠들은 재력있는 마을에 스카웃되어 소작을 주고는 그 마을의 풍물굿을 이끌게 하였다. 그리고 풍물굿은 천재적인 상쇠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양순용선생님도 소실적부터 천재적 재질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상쇠이하 치배들은 평상시 입장단으로 한배만 정확히 하고, 가락은 단순하게 하여 농한기때나 굿이 이루어지기 얼마전부터 익혀 두는 것이다. 바쁜 농사일속에 매일 연습이 가능했다고는 볼 수 없다. 가락의 단순함을 장고의 궁편과 채편의 넘나듬으로 장고가락의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가락을 치면서 단순히 원만 도는 것이 아니라, 원을 돌 되 지그재그로 돌면서 앞사람과 뒷사람이 서로 교차가 되어 변화무쌍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꼬깔의 맨위의 꽃을 느슨하게 묶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 꽃이 살랑살랑 움직이게 하였다. 미친듯이 고개를 흔들고 가락을 잡스럽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풍물의 집단적 신명은 만들 수 있다.  그래야 그 간결성으로 인하여 누구나 쉽게 풍물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풍물이 가지고 있는 간결성의 멋을 ,지금은 풍물이 자꾸 무대로 옮겨지면서 그 멋을 잃어버리고 있다. 간결하지만 장대하고 웅장한 멋이 바로 우리 민중의 멋이다. 장고에 기닥이 빠지면 그 소리가 착착 들어맞아 참으로 정갈하게 들린다. 양순용선생님은 메고칠때는 기닥을 쳐서는 안된다고 했다. 양순용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얼마전 전수생들이 설장고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는 나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참! 음음.... 아들이 한다고 하는데...."
우리들에게는 설장고의 의미는 맛있는 가락을 치는 정도로만 그리고 극히 제한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아니 거의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설장고춤이라는 것이 있던 것이 아니다. 양순용선생님은 풍물이 잡스러워지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를 하신 분이다. 기교가 뛰어나게 되면 흘러 버린다. 즉 그 속에서만 빠지게 되는 것을 염려하셨다. 요즘 텔레비젼을 보면 고교챔프라고 해서 고등학생들이 어려운 춤동작에 푹빠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익히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을까는 쉽게 짐작이 간다. 인생은 그렇게 허비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을 소통시키고 和를 위함이다([禮記] 樂記중에서). 나만의 감각적 몰입이 아니다. 풍물은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우리 조선민중의 위대한 삶의 문화이다. 내가 어릴적 마을에 환갑잔치가 있어 구경을 가게 되었는데, 밴드와 기생들이 와서 춤을 추고는 노래를 불렀고, 흥청망청 시간은 흐르고 결국은 싸움과 욕설로 환갑잔치를 마감하고 말았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풍물이 이처럼 흥청망청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충북대학교에 풍물패가 많은데, 이것은 우리 선배들과 그리고 학교의 기타 다른 성원들간의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공대 풍물패를 만들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운 것 뿐이 없다. 풍물은 되도록 간소하게 그리고 학과공부와는 지장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연습도 일주일에 세번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 기반으로 각과로 풍물패를 늘려가는 계획이었다. 물론 다른 단과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내에 풍물패가 거의 각 과마다 있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우리 선배들(그리고 각각의 풍물패의 창립멤버)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다고 후배들은 말하고 있다. 민연이 중앙동아리로서 위치를 잡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기능적인 우위로 민연을 자리매김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풍물의 가락을 알면 굿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풍물의 의미를 안다면 지금시대에 새로운 공동체문화를 다시 재창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을굿은 고대로부터 내려왔겠지만, 내가 말하는 마을공동체속에서의 풍물의 조직화는 근세의 일이다. 촌락공동체가 성립된 19세기에서 구한말에 이르러 일제식민지를 거쳐 최소한 1970년대까지 마을굿은 명맥을 잇고 다듬어져왔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 5백년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요인도 많았겠지만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조선왕조는 왕이 있고 신하고 있고 인민(人民)이 있는 것이다. 천민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과거를 통해서 관료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왕조가 民을 파악하는 방식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하다. 최소한 조선초기에는 양반이라는 것은 관직을 얻은 사람을 칭하는 것이었으나 사회가 오랬동안 고착되면서 양반이 신분으로 정착이 되어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구한말까지 양반도 일반 서민과 마찬가지로 동일선상에서 파악되었다. 이것은 당시 조세수취체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구의 중세 봉건제가 사적으로 농민을 예속하고 모든 인식적(정치, 군사, 경제, 법률) 구속을 하였을때, 최소한 조선왕조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 있었고, 서구의 중세 봉건제보다는 우리의 조선왕조가 보다 합리적인 제도인 것이다. 서구의 자본축적과정이 소위 말하는 엔클루저운동으로 농민이 땅에서 분리가 되면서 시작된다. 땅의 소유가 집중이 되면서 대토지소유와 대경영으로 상품생산이 이루어진 역사는 서구의 역사이다. 대량생산이라는 방식과 과학기술 그리고 자본이 결부되면서 현대자본주의라는 특이한 생산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상품이 생산되고 유통이 되는 역사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이었다.

다섯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하고
다섯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말달리며 들사냥질 하는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얻기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감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이글은 도올선생님의 '[노자 길과 얻음]'에서 가져온 것임)

지금 老子의 한 챕터를 보면 우리의 현실이 느껴진다. '노자'에서 말했듯이 얻기 어려운 재화로 인하여 우리 사람의 마음을 한군데에 안주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인류가 씨족이나 부족에서 개개인이 평등한 위치에 있었던 공동체가 이러한 재화를 얻기 위한 경쟁체제로 들어가면서 씨족이나 부족이 해체된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즉 상품경제로 貨가 이동되고 축적되는 시기로 인류가 경쟁체제로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양식은 인류의 공통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자는 인간이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경쟁체제로 들어가면서, 인간의 욕망의 끝도 없는 위태로움을 경계한 것이다. 기원전 시대에 쓰여진 [노자]와 마찬가지로 [史記] [貨殖列傳(화식열전)]에서도 보면 물류방식이나 마케팅방식이 지금과 비교해도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물건을 멀리서 운반해오면 이윤이 작다라는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사기]에 그렇게 쓰여져 있다면, 이미 벌써 상품이 상업적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조선시대를 서구의 발전사관에 맞추어 전근대적인것으로 보지 않는다. 조선왕조는 우리의 근대성을 제도적으로 획득하는 과정이었고, 조선민중들 또한 소농업경영체제를 안정시켜나가면서 마을공동체를 이룩하였다. 조선의 농민들이 집약적 농업을 발달시키면서 농업경영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집약적 농업은 땅의 지력을 약탈하는 그러한 농법이 아니다. 지금처럼 화학비료와 다량의 농약을 주면서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토지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농법이 발전하였고(이앙법, 우경법, 제초, 시비법등), 또 한편으로는 분산되어 있는 전답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가족내 노동력의 사용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대기에 시간차를 주어 분산되어 있는 자경지에 효과적으로 가족노동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분산되어 있는 자경지와 다른사람들의 자경지에서 농구를 공동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품앗이등과 같은 공동노동도 함께 이루어졌다. 영세착포제라하여 자경지가 한군데에 집중되지 않고 분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영세착포제는 조선의 민중이 끊임없이 소농업경영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세착포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세착포제(零細錯圃制)는 소농민경영의 기술체계, 곧 소농적 농법의 한 가지 구성요소로 이해될 수 있다. "田植時期(전식시기)의 노동수요를 단혼 소가족의 자가노력으로 타개하기에는 착포형태가 적합하다. 분산된 포장(圃場)에서의 경작이, 각각의 포장에서의 용수이용(用水利用)의 시간차를 낳고, 早.晩品種(조.만품종)에 따른 작업시기의 차를 발생시켜, 그 시간차가 극단적인 노동수요의 집중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는 수전(水田)에서의 전식(田植)에 대한 것이지만, 영세착포제는 이뿐만 아니라 경지의 분산을 통한 자연재해로부터의 위험의 분산, 또는 다양한 지질의 확보를 통한 다각적인 경영구조의 성립등을 가능케 함으로써 소농민경영의 안정적 기반을 제공한다. 그것은 또한 농구.수리시설의 공용, 농번기에 상호 노동의 교환 등을 동반하게 됨으로써 소농민경영에 적합한 공동적 노동조직의 기초가 된다. 구한말 지방에 따라 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촌락의 공동노동도  이 영세착포제에 그 하나의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사회경제사] p484~p485, 이영훈, 한길사)"
조선초기 대농법을 기초로 하는 농장경영이 국가가 파악하는 수취체계이며, 인신지배의 구조였다. 집약적농업의 발달로 대농법에 의한 농장이 뒤로 물러서면서 토지의 집중화가 분산화되고, 농업경영이 균질화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사족이나 호족에 의한 토지의 집중이 있었지만 구한말까지 토지 및 경영이 전국적 규모에 있어 균질화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백골징포라하여 마을에서 죽은 사람을 호적에 등재시켜서 군역을 지게하고는 그 군역대신 布(포)를 마을에서 공동으로 부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군역이 가장 부담스러운 역이였다. 그래서 유사시 징발이 되지 않기 위해 마을에서 죽은사람이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백골의 군역을 마을에서 공동으로 포(布)로 대신 부담하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조세와 군역이 마을공동체에서 공동으로 부담하게 된다.
조선왕조의 호적은 조세와 군역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조선초기의 대농장은 노비에 의해 경작되었다. 그 당시 노비는 전인구의 1/3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노비들은 국가의 모든 조세와 요역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불안정한 독립자영농들이 스스로 노비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이것이 노비에 의한 농장경영의 재생산구조였다. 당시의 농업생산력은 [農事直說]([농사직설]은 세종11년(1492)에 摠制 鄭招 등에 명하여 편찬한 한국 최초의 官撰農書이다.)의 단계로 대농법이 생산력적 우위를 점하였고, 국가에서도 그것을 수취체계와 인신지배의 구조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한 노비노동에 의한 노동생산성의 농법에서 점차 토지생산성의 농법으로 바뀌어가면서 다시 말하면 대농법에서 집약농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주호와 협호의 경영이 안정되어가고 조선초기 솔거 혹은 외거노비의 형태가 협호로 전환되면서 인신적 예속을 받던 노비의 상태에서 보다 자유로운 관계로 지위가 상승 되어갔다. 그러나 협호 역시 모든 조세와 군역에서 제외가 되었다. 이 당시의 자영농 또한 매우 불안정하여 협호에 투탁(投託)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고, 그것이 주호-협호의 재생산구조였다. 그리하여 호적에는 주호만이 호적에 등재되었고, 협호는 등재되지 않았고, 역시 이러한 주호와 협호의 관계를 수취체계의 근간으로 삼았고 또한 인신지배의 구조였다. 이러한 주호와 협호의 관계에서 조세나 군역의 부담은 주호를 대상으로 하였다. 주호와 협호의 관계는, 주호는 경제적으로 규모가 있는 호(戶)로서 협호에게 가옥이나 종자 소 농구등을 제공한다. 협호는 비자립적농가인 것이다.  이러한 경영구조도 조선민중의 소경영체제를 안정시킬려는 위대한 노력들로 주호와 협호의 비자립적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앞에서 말한대로 전국적인 규모로 토지나 농업경영이 균질화되는 과정이 장기적으로 진행되고, 집약적농법의 발달은 소농민경영을 안정시켜왔고, 이러한 소농민경영의 기반에서 주호를 근간으로 한 수취체계가 점차 마을공민이 조세와 역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조선민중이 그만큼 사회경제적지위가 상승이 되었다는 것이다.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소경영의 안정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고, 장시는 지역의 생산물을 유통시키는 장이었고(장시가 소경영체제를 더욱 안정시켰을 것이다.), 지역적 고립에 있었던 마을을 외부와 연결해주는 정보의 교환장소였고, 이러한 장시를 기반으로 전국적 규모의 거상들이 등장하였다. 근대화의 길목에서 있는 조선민중들의 삶은 바로 이러했다. 여기서 근대화라는 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근대적과정이 아니다. 서양에서의 근대화과정이라는 것은 우선 경제에서 농민이 광범위하게 땅에서 분리되는 엔클루저운동이 일어나 농민들이 임금노동자로 전락되고 그것에 기초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고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적으로는 데카르트에 의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중세의 교회의 권위에서 벗어나려는, 그 굴레를 끊어버릴려는 我와 他가 완전히 분리된 인격체인 것이다. 서양의 국가관도 인류가 살아온 공동체의 연결고리를 철저히 끊어버리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조선민중들은 경제면에서는 농업에서 집약적 농업을 바탕으로 소경영을 안정적으로 이루었고  마을공동체를 이루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을 공동체는 단순히 집단으로 생산하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사회의 씨족사회나 부족사회의 공동체는 아니었다. 사회주의에서 말하는 집단농장체제와는 또 다른 성격이다. 제도면에서는 서구는 중세봉건제로 농민이 사적으로 예속당하는 농노적 성격이었지만, 우리의 조선왕조는 기본적으로 개별인신지배로서 왕이 있고 관료가 있고 백성이 있는, 사적(私的)으로 인민을 지배하지 못하였다. 인문학적으로는 동학사상과 같이 '인내천'사상이나 '천지가 한 생명이다'라는 인간의 존엄과 하늘아래 모든 것은 한 생명이라는 민중사상이 있었다(KBS 도올논어, 22강 중에서).
나는 동학사상을 이러한 조선민중들의 삶에서 이해를 한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인간에 대한 더 이상의 존중도 없다. 그리고 "천지(天地)가 한 생명이다" 라는 자각 또한 이러한 조선민중들의 삶에서 나왔을 것이다. 소농민경영체제를 꾸준히 안착시켜온 현실은 바로 조선의 민중들이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장시의 발달로 전국적 정보네트워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그동안 지역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했던 고립된 삶에서 보다 보편화된 삶으로의 전환이 되는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근대화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풍물은 이러한 민중들의 삶속에서 나오는 위대한 예술이다. 마을공동체를 묶어주는 것이 바로 풍물이었다. 그리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지만, 나는 탈춤을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계층과 조선왕조관료조직의 최하말단인 대개 중인신분을 이루는 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비판의 강도가 마을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내용으로 부적절하고 또한 상당한 기예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장시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장시를 있는 상인들은 전국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을 것이고 그 속에서 조선왕조의 한계성을 일찍 깨달은 자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중인신분들도 조선의 성리학적 이념에 구애가 없는 관료의 실무직인 말단에 있으면서 조선왕조의 한계성을 일찌감치 깨우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새로운 사회체제를 끊임없이 갈구한 계층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계속 공부해나가면서 밝혀낼 것이지만, 그렇지만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풍물은 우리의 역사가 근대성을 획득하는 시기에서 나온것이며 최소한 그당시의 우리 조선민중의 삶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좀더 마을공동체가 어떻게 운영되어왔는가를 연구해본다면,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자들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을공동체에서는 늙은이 과부 홀아비 고아 병든자에게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마을공동체가 공동으로 해결하였다. 좀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집안의 가장의 죽음은 곧 그 가족의 해체로 직결되었다. 유망을 하거나 노비로 전락되는 매우 불안정한 농민경영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농민경영의 상태를 안정적인 소경영으로 마을공동체를 이룬 역사는 우리 조선민중의 위대함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동노동조직인 두레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두레의 노동의 임대(賃貸)는 원칙적으로 교환노동으로 청산한다. 빈농이 자기 노동을 조직적으로 제공하기 위하여 두레에 참가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때는 작업종료 후 금전 또는 곡물로 변제를 한다. 그리고 작업일의 할당은 상양(相讓)에 의하여 가장 급한 집부터 먼저 시작하며 1일씩 할당된다. 매일의 작업운영에 있어서의 통제는 관습에 의한다.  현재 의무적이고 강력한 집체성을 소유한 洞두레는 존재하지 않지만 부락 위부에서 노동력을 구하기 어려운 일부 지역에서는아직도 두레가 잔존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공동작업이라는 하여 농번기에 두레가 형성되고 있는데 두레에 가입하는 데는 강제성이 없고 임의적인 점에서 동두레가 아니라 두레와 유사하다. 그런데 가입에 강제성은 없지만 공동작업이라는 두레에는 대부분이 가담하게 되는데, 경작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가입하여 작업향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 매년 춘계에 전체회의에서 공동작업에 적용될 1日임금과 농경지의 대소에 따른 노임이 결정된다. 또 이 회의에서 두레에 시행할 규칙도 정한다." -([촌락공동체의 법리] p53, 법학박사 이광병, 세영사)
마을공동체의 자세한 운영상태는 나 또한 아직 깊게 연구한 바가 없다.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 있는 실정이다.
앞의 이해를 바탕으로 풍물을 이해한다면 풍물과 탈춤은 순수에 말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학교내에 풍물패의 활성화란 기치로 풍물패를 만들어가던 선후배들의 노력은 분명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었다. 그리고 장승굿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의 사견이지만 정기적으로 공연을 올리는데 강박감을 가지지 말고 정말로 민속을 연구하였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전수를 통해 배운것은 자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만 족하다고 생각든다. 좀더 창조적인 활동을 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학교내 많은 문화패들이 민속연구회가 하나의 모범이 될수 있다. 또 한가지 이제는 쇠따로 장고따로 배우지 말고 모두가 상쇠가 되었으면 한다. 졸업후 사회에 진출하여서 후배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이끄는 리더가 되기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동아리활동은 자신을 담금질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학과공부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가치관형성을 위해서 많은 공부와 노력을 해야한다. 그리고 동아리방을 깨끗이 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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