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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제23강) `개벽과 동학`
 홍기성 
  | 2001·07·15 17:49 | 조회 : 4,784 |
제23장 개벽(開闢)과 동학
이번 강의는 동학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한다.
그런데 동학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기전에, 동학이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성의 근대성의 출발이라고 말했다. 전근대적이라 함은 우리가 나쁜말로 쓰인다. 전근대적이라는 말을 봉건적이라는 말을 쓸 때도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근대의 기점을 어디에 잡는데에 있다. 역사를 볼때 어디가 고대고 어디가 중세고 어디가 근대인가? 살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고대인들은 고대인들이라고 하고 근대인들은 왜근대인들이라고 하느냐? 어디가 중세이고 왕건이는 중세사람인가? 이러한 말들이 상당히 애매한 말이다(고대 중세 근세 등의 개념은 시대구분론의 한 유형일 뿐이며 절대적인 역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pre-Modern, 봉건제
Modern, 자본제   -서양역사의 경우-)
철학적으로는 근대적 인간이 될려면 근대적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 근대적 인간의 규정을 기준하는 속성을 근대성(MordernMan, 근대적 인간을 규정하는 추상적 속성, 서양의 경우 근대성은 이성주의(Rationatism)와 관련되어 있다.)이라고 한다. 이 근대성이라는 것을 서양사람들은 철학사에서, 근대의 아버지인 데카르트가 "고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했을 때 그 전에는 그러한 말을 인간이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나의 삶의 주체인 내가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있다라는 말은 서양중세는 기독교하고 관련이 있어 하나님이 주신 나의 본질(엣센스(essence, 나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본질, 본질은 신에게서 부여받는 것으로 중세인들은 생각했다.)이 나의 실존에 앞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각해주시기 때문에 내가 있지, 내가 생각해서 내가 있을 수가 없었다(실존(Existence)dl 본질을 앞선다는 사르트르(J.P.Sartre,1905~1980)의 말은 근대성의 한 표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서양에서는 중세에서 근대의 이행은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넘어왔다라는 것이다(중세(신 중심사고), 근대(인간 중심사고)). 그래서 과거에는 신을 중심으로 인간이 포진되었는데, 이제는 인간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서양철학사에는 코페르니쿠스적(칸트 인식론을 기술한 표현,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듯이 세계가 인간중심으로 새롭게 인식되는 변화를 가리킴) 혁명이라고 한다.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바뀌었다면, 전번에 말한 向壁設位(향벽설위)에서 向我設位(향아설위)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민족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향벽설위에서 향아설위로의 변화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며 우리 근대성의 출발이다.). 귀신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 귀신이 아니라 그 귀신이 곧 나라는 내가 제사상을 차려놓고 내가 먹었다. 내가 먹는다는 그 자체가 그것이 곧 하늘님이 잡수시는 것이다. 이것이 동학사상의 인내천이다. 예들들면 19세기를 보면은, 논어를 보면서 다산이라는 인물은 강진에 유배당해 많은 책을 쓰셨다. 다산은 19세기 초반 1836년에 돌아가셨다. 정조의 선생을 하신 양반이다. 다산선생과 수훈선생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다산선생은 논어 고금주를 쓰면서 조선왕조를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체제에 모든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를 어떻게 해서든 재해석해서 바로잡고 탐관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선생이 목민심서를 썼는데, 목민심서는 조선왕조의 구조속에서 목민이었다. 그러나 동학사상은 조선왕조를 포기하자는 것이다. 동학과 다산은 입장이 다르다. 이러한 구질서속에서는 살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오백년은 끝난 것으로 보았다. 동학을 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은 개벽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천지가 개벽하는 말을 쓴다. 개벽이라는 것을 동양사상에서 본다면, 옛날에는 태초에 渾元之一氣(혼(흐릴)원지일기, 음양이 구분되지 않는 가장 원초적인 우주의 혼돈상태)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주 믹수된 혼원된 一氣는 음양의 구분이 없다. 이 혼원지일기가 양기와 음기로 나뉜다. 淸輕者上爲天, 濁重者下爲地.(청경자상위천, 탁중자하위지.) 陽은 경청자라 하여 가볍운것은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중탁자라 하여 무겁고 탁하여 아래로 내려간다. 그래서 경청한 것과 중탁한 것이 나뉘어 분리가 되는 것이 천지 개벽(開闢, 하늘(天,陽)과 땅(地,陰)이 갈라지는 우주 최초의 질서의 탄생)이다. 우주가 처음에 음양도 구분도 안되던 시대에서 음양이  구분되어 나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과 양이 생기고 해와 달이 생겨나고 해와 달이 생기고 밤과 낮이 생기면서 구별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을 원래 한대(漢代) 철학에서 개벽이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동학사람들은 선천개벽 후천개벽이라는 말을 쓴다. 이 사람들은 개벽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온 역사가 오만년의 역사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이 되어서, 도올 김용옥이 생각하기에는 천지개벽이라는 것은 우주론을 포괄하여 인간의 역사의 시작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오만년의 선천개벽세는 타락과 잘못된 세계라고 한다. 그래서 근원적으로 다시 개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천개벽 오만세가 끝이 나고 후천개벽 오만세가 다시 시작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선천개벽 5만년(어둠의 세계)이 끝나고, 후천개벽 5만년(밝음의 세계)이 시작한다.). 동학사상이라는 것은 혁명이 아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명을 바꾸는 것이다. 즉 정권의 교체만 있는 것이다. 김씨 왕조가 이씨 왕조로 바뀌고 이씨 왕조가 무슨 왕조로 바뀌는 그러한 것들은, 사실은 이것은 우리에게 비극이다.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 동학에서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사고가 바뀌고 삶의 양식이 바뀌고 천지가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학사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인 변화만을 노린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삶과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했고 그것이 개벽이라고 했다(하늘님 하신말씀 개벽후 오만년에 네가또한 첨이로다 나도또한 개벽이후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만나 성공하니  [용담가]). 물론 동학이라는 말이 나온게 된것은 서학에 빗대서 한 말이지만, 교조신원운동을 하기 위해서 공주 삼례에서 모여 안되니깐 서울 광화문 앞길에서 복합상소를 할 때 거기에 쓴말이 "동학은 동학이 아니다" "서학에 대해서 동학이 아니다"  "이것은 無極大道이다." ( 1893년 11월 고종에게 올린 복합상소문) 라고 했다. 이것은 극이 없는 무한한 대도가 바로 동학이라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동학을 무극대도라는 것과 개벽이라는 두가지 말로 동학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동학은 동학이 아니라 무극대도다. 동학은 혁명이 아니라 개벽이다. 이것은 나 도올이 동학을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이다.). 여태까지 동학이라고 하면 추상적인 정치사상만으로 알고 있고 혁명사상으로만 알고 있었다. 동학을 볼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해월선생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못하고 피상적으로 이야기 할때, 수운선생의 일생을 보면 공자하고도 공통분모가 많다. 공자도 아버지가 70세때 낳았고 수운선생도 아버지 근암공이 63세 때에 낳은 아들이다(아버지 근암공은 과부였던 韓씨를 셋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수운을 낳았다(1824년). 수운은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이다.). 근암동은 학문이 있는 사람으로 제자들이 과부를 들여보냈다. 재가녀의 아들은 서자보다도 못한 더 낮았다. 셋째번 재치에다가 들어온 여자가 재가녀로 그리고 재가녀가 낳은 아들이었으니 정말로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10살때 모친이 돌아가시고 17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살때 밀양 박씨와 결혼을 한다. 이러한 것이 상당히 공자와 비슷하다. 공자도 17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9살때 결혼하여 잉어를 낳았다. 그래서 수운선생은 21세부터 36세까지 방황을 한다고 한다. 이것도 공자와 비슷하다. 수운선생은 1860년에 득도를 하다가  1861년부터 포교를 하다가 돌아가신 해가 1864년에 대구장대에서 돌아가셨다. 결국은 3년정도 지나서 순교를 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것이나(십자가형이라는 것은 로마제국의 사형방식이다.), 수운선생은 참수를 당하였다(예수(십자가형)-->사도바울이 전도, 수운(참수형)--> 해월 최시형의 전도). 그런데 3월3일 참형을 당하기 일주일전 해월선생이 유상호라는 사람에게 백냥을 얻었다. 소크라테스가 곡세모민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혔을 때 플라톤이 손을 써 나가게 해주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피하지 않고 아테네의 법에 따라 죽겠다고 했고 그래서 돌아갔다. 마찬가지로 해월선생도 백냥을 가지고 옥리들을 다 매수하였다. 해월선생이 옥졸로 변장을 해서 밥상을 들고 수운선생이 있는데로 들어갔다. 해월이 엎드려 절하기를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나가시면 됩니다."하고 말했고 수운은 의연히 앉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곰방대를 수운이 가지고 온 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해월에게 아무말도 하지말고 나가라고 했고, 해월은 상을 물려 옥에서 나왔다. 곽도원네 집에 와서는 사람들이 왜 곰방대를 상에 올려놓고 보냈느냐고 했다. 그래서 곰방대를 깨어보니 종이가 말려 있었고 거기에 쓴 시가 있었다.
燈明水上無嫌隙(등명수상무혐극)
柱似枯形力有餘(주사고형력유려)   
吾順受天命(오순수천명)
汝高飛遠徒(여고비원도)
"등불이 물위에 틈없이 밝았다.
기둥은 죽어 말랐을지라도 오히려
힘은 남아돌아가나니,
나는 하늘님의 命을 순순히 받겠다.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등명수상무혐극 주사고형력유려" 등이 물위에 한 치의 틈이 없다. 기둥이 썩어 말라비틀어 보이지만 기둥은 썩어 말라비틀어져야지만 힘을 낸다. 등명수상무혐극이라는 것은 수운선생이 평생 자기가 밝힌 진리가 이 세상에 완벽하게 밝힐 때까지 밝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운은 "나는 오히려 썩어 없어져야 힘을 발한다" 수운은 자기가 여기서 살기를 바라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신 이야기가 "오순수천명 여고비원도" "나는 천명을 순순히 받겠노라" 즉 수운이 썩어 비틀어져야 오히려 기둥이 힘을 받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해월에게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했다. 우리시대 젊은이들에게 우리민족이 가야할 길은 정말로 높이 나르고 멀리 뛰는 수밖에 없다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우리나라는 석유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산뿐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높이 나르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이것이 수운선생이 해월선생에게 한 마지막 교시이다. 그래서 해월은 도망을 갔다. 해월은 평생을 도발이꾼이 되었다. 재미난것은 수운선생을 어떠한 죄목으로 다스렸느냐는 것이다. 수운선생이 1861년에 검결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수운선생이 목검으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수운선생의 검결이라는 시는 우리 국민이 알아야 될 시이다. 수운선생의 기개를 나타내는 시이다. 대구감사 서헌순이가 수운선생을 재판을 했는데, 수운선생을 때려잡을 근거를 찾지 못했다. 포교하면서 무극대도니 하는 것들로는 죄목이 될 수 없었다. 바로 이 검결을 가지고 죄목을 삼았다. 즉 검을 사람들에게 가르켜서 모반(혁명)을 꾀했다는 것이다(이검가, 국정모반. 1864년 2월29일 조정으로부터 내려온 처형문의 내용). 사실 이것이 검결이지만 자기가 개벽의 깨달음의 기쁨을 쌍칼로 춤을 춘것이다.

時乎時乎 이내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

이때 시호라는 것은 "때다 때다 다시 안올 때다." 이다. 이 세계가 오만세의 개벽의 시대가 끝이 나고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돌아온다는 말이다.

萬世一之 才夫로서
五萬年之 時乎로다
"만세에 한 번 태어날 장부로서 오만년만에 맞을 때다."

龍泉劍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용천검은 옛날 중국의 보검이다. 그런데 사실은 수운이 용담에 있었기 때문에 쓴 말이다.

舞袖長杉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浩浩茫茫 넓은 天地
一身으로 비껴서서

무수장삼을 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를 한 몸으로 마주선다는 것이다.

칼노래 한곡조를
時乎時乎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칼은
日月을 희롱하고

날랜칼은 동적인 세계를 말한다.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혀있네

게으른 무수장삼은 느리게 움직임을 말한다.

萬古名將 어데있나
才夫當前 無將士라

"만고 명장이 어디있느냐 바로 이 장부앞에 또 장수는 없다" 라는 말이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身命 좋을시고   

이것이 검결로 수운선생의 죄목이었다.
수운선생의 시를 하나 더 소개를 하면은

甁中有仙酒, 可活百萬人.(병(병)중유선주, 가활백만인)
병속에다가 신선술을 담아왔다. 그런데 이것은 백만인을 살릴 수 있다.

釀出千年前, 藏之備用處.(양(술빛을)출천년전, 장(감출)지비(갖출)용처.)
이것은 천년전에 빛었는데, 그것을 크게 쓸때가 있어서 숨겨 두었다.

無然一開封, 臭散味亦薄.(무연일개봉, 취산미역박.)
괜히 쓸데없이 한 번 개봉하면, 냄새도 없어지고 맛도 또한 엷어진다.

今我爲道者, 守口如此甁.(금아위도자, 수구여차병.)
지금부터 내 도를 행하는 자들은 입을 지키기를 이 병과 같이 해라!
상당히  절제된 언어들이다. 해월선생이 수운선생의 도를 받아간것이 이러한 것이다. 항상 여기서 "守心正氣" "개벽"이라는 것과 관련지어서 우리 역사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놈이 얼마나 지독하게 해쳐 먹었는지 멀쩡한 만석보를 고치고 그것도 모자라 그 밑에 新洑(신보)를 만들어 물세를 받아 쳐먹었다(이평면에 신보를 만들어 물세라 하여 7백여석을 거두었다.). 지아버지 비각 세운다고 일천냥을 거두어 들이고, 지애비 환갑잔치라고 몇만냥을 받아 쳐먹었다(태안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 비각 세운다고 천여냥을 녹탈함.  기생출신 서모가 죽었을 때 매호당 한냥씩 부의금으로 거둠.). 죄목도 不孝 不睦(불목(화목할))으로 지금 말하자면 모두 삼청대로 끌려가는 것이다(不孝, 不睦, 淫行, 雜技 등의 허구의 죄명을 쒸워 2만여냥을 강탈.). 조병갑이는 탐관오리로써 한량이 없었다. 그런데 1864년에 수운이 참형을 당하고서부터 1894년까지는 해월의 역사이다. 동학란(현재 역사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펴현은 "갑오농민전쟁" 갑오동학혁명"이다.)이라고 하면 전봉준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동학에는 포접제도가 있다(包接制(포접제), 동학의 포교를 위한 조직방식, 대접주들의 공식명칭은 보은집회(1893.3.)에서 확장되었다.). 지금 말하면 다단계 판매의 조직이다. 동학의 접이라는 것은 지역이 아니다. 지역과 관계가 없는 인맥이다. 한 사람이 인맥으로 지역에 관계없이 자기 친척에게 포교를 한다. 그렇게 해서 10명을 모은 사람은 접주가 된다. 50개의 접주를 관리하는 것이 '포주' 라고도 하고 '대접주' 라고도 한다. 해월선생은 포접제로 30년동안 동학을 조직한 것이다. 전봉준(1855~1895)이라는 사람은 고부에 있던 김덕명이라는 금구대접주의 휘하의 고부 소접주이다. 전봉준이 동학을 들어온것이 불과 1891년이다. 전봉준이라는 사람은 동학에서 볼때, 위치가 아주 박약한 사람이다(전봉준이 동학에 입도한 것은 전봉준 자신이 고백한 [供草] 기록에 의하면 1892년의 사간이다. 동학혁명의 두 해전 일이다.). 그러나 전봉준이라는 사람은, 나름대로 동학을 기회로 삼아서 동학도들과 힘을 합쳐서 고부 조병갑에게 못견디어 일어난 것이다(기포시(起包時)에 원민(寃民)과 동학이 합하였으나, 동학은 少하고 원민은 多하였다. -전봉준 심문기록-). 역사에서 해월과 전봉준의 문제는 큰 것이었다. 한 예로 도올 김용옥이 도올서원을 몇십년을 공을 들여 키워놓아서 수천명의 학생이 있었다. 최근에 떨떠름한 학생이 들어와서는 "이제는 못 참겠습니다. 나가서들 싸웁시다." 라고 말했다면, 그것이 해월입장에서 용인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안되는 것이다. 해월선생은 계속 전봉준에게 고부사건이래로 통유를 발해서 봉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經(경)에 이르되 현기(玄機)는 불로(不露)라 물위심급(勿爲心急)하라 하였으니 급한 마음을 두지말고 후일을 기다리라. -해월의 1894년 4월2일 경고문). 여기서 소위 말하는 남접 북접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남접의 대장은 전봉준이고 북접의 대장은 해월인데, 남접과 북접이 대립하여 남접은 민중편에 있고 북접은 혁명을 부인할려는 반동분자 새끼들이라고 했다. 이렇듯 유치하게 동학사를 써왔던 것이다(남접과 북접간의 대립정황은 동학사를 쓴 오지영이 자신의 역할을 강종하기 위하여 좀 과장되게 표현한데서 기인한다. 동학에는 애초부터 남접과 북접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기술된 것이다. 동학은 분명히 해월선생이 다 이끌어간 역사이다. 그렇지만 전봉준 장군은 나름대로 위대한 분이다. 조금도 편애할 생각이 없다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남접 북접이라는 말은 원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원래 북접이라는 말은 용담에서 검악이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접이라는 말을 썼다(해월을 수운이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북도중주인, 북접주인이라 명한 것은 용담과 검등골 사이의 지역감각에 기인한 것으로 남접 북접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근본적으로 이런식으로 해월선생을 왜곡하고 있다. 7~80년대가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전부 전봉준 중심으로 동학을 바라보게 되었다.
당시 전봉준은 전봉준 나름대로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왔었다. 자기 아버지(전창혁)이 조병갑에게 곤장형을 받고 죽었다. 전봉준도 뜻이 있는 사람이고 동네에 훈장노릇까지 한사람으로서 원래 무인이 아니다. 전봉준이 문장을 하니깐 사발통문(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참가자의 이름을 원으로 돌려 적은 통문, 전봉준의 이름이 보이고,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사'라고 쓰여있다. 1968년 12월 발견)을 돌려 관아를 치게 되었고, 조병갑이는 잽싸게 도망을 가버렸다. 1894년 1월10일날 고부 군수 조병갑에게 쳐들어갔고, 고부 군수 조병갑은 도망을 갔다.
해월선생은 봉기를 끝까지 말렸었다. 동학군은 4월27일날 승승장구하여 백산으로 동학군이 모였다. 백산이라는 것은 한국사람들은 전부 힌옷을 입어서 앉으면 죽창을 들고 있어 죽산이 되었고 서서 있으면 힌옷으로 백산이 되었다고 한다("일어서면 백산이요 앉으며는 죽산이라"). 동학군이 승승장구하여 전주를 입성하였을 때,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빠리콤뮨이었다. 동학이 그 지역의 정치를 집강소를 통하여 장악하였다. 해월선생은 청군이 들어오고 일본군이 들어오니깐 우리의 실력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하여 전봉준에게 봉기를 자제시켰다.  그러나 나중에 백범 김구선생(1876~1949, 18세에 동학에 입도,  19세에 황해도 팔봉접주가 되어 해월선생을 만났다)일지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단지 동학군은 전남과 전주를 중심으로 세력이 있었지만 원래는 동학의 포교는 전라도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고 경상도를 중심으로 충청도의 보은으로 해서 강원도를 포교가 되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전라도에 1880년대에 동학이 전파되니깐 포교가 아주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호남이라는 것은 곡창지대이다. 영남은 산맥으로 갇혀있어 외부로부터 영향을 들 받았다. 호남은 서울로부터 지리적으로 터져 있었기 때문에 수취와 수탈을 많이 받아왔다. 지주들이 대부분 서울에 사는 부재자 지주들이었다. 그래서 지주나 관료들이나 모두 백성들을 착취만 하였다. 그래서 동학사상이 오자 폭발적으로 포교가 되었다. 동학농민전쟁중 마지막으로 일본군이 들어오니깐 해월선생이 하시는 말씀이 "호랑이가 물려 달려드는데 어찌 앉아서만 당할  것인가!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싸워야지."라고 했다. (해월의 마지막으로 기포명령을 내린것은 1894년 9월18일이었다. 그때 김구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은 진노하는 안색으로 순 경상도 어조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 -백범일지-)
해월선생은 그때 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이것이 천명이다 하여 기포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호서군과 호남군이 논산에서 합치어 우금치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동학의 마지막은 해월선생이 기포명령을 내려가지고 마지막 결전을 한 것이다. 해월선생은 "안되겠다! 도저히 갈 곳이 없다." 하여 기포명령을 내린 것이지만 그 전까지는 봉기를 유보하였다. 전봉준장군이 공초라고 해서 심문을 받은 기록이 그대로 있다고 한다. 서광범(김홍집 내각의 법무장관, 전봉준을 심문하고 사형판결을 내렸다. 당시 개화파들은 전봉준과 대원군을 한패로 몰고 친일적 개혁을 지지했다.)이라는 사람이 취조한 기록이다. 이렇게 생생한 전봉준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다. 전봉준의 목소리가 가슴이 저린다고 한다. 마지막 신문에서 전봉준이가 한 말이 있다. "내 한몸의 害(해)를 위해 기포하였다면 어찌 남자의 일이라 하겠는가? 衆民이 寃歎(원탄)하는 故로 백성을 위해 除害(제해)코자 한 것이었다. 내 이제 어찌 구구한 생명을 위해 活路(활로)를 구하리오?" 라고 말했고, 재판관인 서광범과 일본인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나의 적이요, 나는 너희 적이라. 내가 너희들을 처없애고 나라를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마라. 내 적의 손에 죽을 지언정 敵(적)의 法의 적용을 받지 않으리라. " 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피눈물나는 역사이다. 전봉준은 그리고 나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전봉준이가 그자리에서 끌려나오면서 외친 한마디가 일본신문에 나왔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오고가는 사람에게 내피를 뿌려주는 것이 가할진대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暗然(암연)히 죽이는가!"
그리고 전봉준장군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시가 있었다.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가 오니 하늘땅이 하나되어 일어나더니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불자모)
운이가니 영웅이란들 어찌해볼 도리없다
爲國丹침誰有識(위국단침(정성)수유식)
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누가 헤아릴까
絞台虛作一孤魂(교태허작일고혼)
교수대에서 헛되이 외로운 넋 될뿐이런가
고독한 혼이 되어 또다시 교수대에서 사라지는 내 인생이란 말인가 하는 아주 애절한 시이다. 우금치에서 패하여 도망을 가다가 자기부하가 있는 순창의 김경천의 집에서 김경천의 밀고로 잡히었다(순창 흥복산 중턱 피로리에서 옛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잡힘. 1894년 12월2일 밤이었다.). 녹두장군의 목에 일천냥이 걸려 있고, 밀고를 하면 군수로 제수를 하겠다고 하여 김경천이가 밀고를 하였던 것이다. 순창 피로리에서 일본군순사와 보부상들의 추격대에 의해 호송되는 전봉준장군을 보고 우리 민족이 부른노래가 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녹두는 전봉준장군을 말한다. 전봉준이 왜 녹두냐면 키가 작아 콩알만하고 단단하다 하여 어렸을적부터 녹두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가지고 우리민중들은 아름다운 시를 썼다. 이노래를 젊은이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이런식으로 우리민중은 시로 노래를 불렀다. 동학에서 해월의 역사는 가장 피눈물나는 역사이고 가장 진실한 역사이다.

     
번호       제 목 이름 작성일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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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성
01·07·15 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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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성
01·07·15 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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