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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제20강) `신종추원`
 홍기성 
  | 2001·07·15 17:44 | 조회 : 3,957 |
제20강 愼終追遠(신종추원)
증자왈: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논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한 두 구절 뽑으라면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신종추원"이다. 증자는 논어에서 충서(忠恕)로 지은 죄를 이 한마디로 배석했다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증자의 말중에서 유교사상을 대변하는 말로 사람들에게 암송되고 있는 말이다.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終(종)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은 끝이 있다. 이것이 생명의 특질이다(모든 유기체는 시작(生)과 끝(死)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기체의 최대특질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유기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슈팽클러(Oswald Spengier, 1880~1936, 독일의 역사학자,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iendes]으로 유명, 토인비에 영향을 줌)라는 사람이 역사는 유기체사관이라고 했다. 즉 역사를, 문명을 하나의 생명체라고 본다면 그 문명은 반드시 태어나고 죽어야 된다. 문명도 생노병사가 있다. 그래서 오스왈로 슈팽클러가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을 썼다. 서구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다. 그 사람은 서구문명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생명체로 보는 것은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것이 생명의 특질은 생멸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전제는 죽게 마련이다. 여기서 종이라는 것은 동양사상에서는 喪(상)이라는 문제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을, 인간의 끝이라는 것을 신중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 신중하게 한다는 것의 주어를, 주석가에 따라서는 죽는 사람본인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으로 "나의 죽음을 신중하게 맞이한다."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나이는 사나이답게 죽겠다." "군인은 군인답게 전투장에서 죽겠다." "혁명가는 혁명가답게 백설 분분한 형장의 이슬로 떳떳하게 사라지겠다." 어떤 사람은 부모형제들이 다 지켜보면서 조용히 화목하게 죽음을 맞이하겠다."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죽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종이라는 것은 인간의 죽음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역사적으로 죽는사람 본인의 이야기보다는 대개 죽은 사자를 보내는 살아있는 사람의 태도로 본다. 그렇게 되면은 상례를 신중하게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이 반드시 신중하게 치러야 한다. 여기서 遠이라는 것은, 상례라는 것은 공자가 삼년상을 고집했고 삼년동안에 終이라는 것은 흉례(凶禮)이다(예로부터 나라에서 행하던 의례를 다섯가지 예로 분류하였다. 1)길례(吉禮) 2)흉례(凶禮) 3)군례(軍禮) 4)빈례(賓禮) 5)가례(嘉禮)).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말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제식이다. 이것을 사례(四禮)라고 한다. 여기서 관혼은 가례(嘉禮, 경사스런 예식)라고 한다. 관이라는 것은 성인식이다. 20살때 자를 받고 상투를 튼다. 그러면 관례를 거쳐야 士가 되는데, 그래서 이것을 士冠禮라고 한다. 그런데 婚(혼인할 혼)이라는 것은 원래 계집녀가 없는 昏(어두울 혼)것이다. 이것을 士昏禮라고 한다. 昏은 황혼 혼자이다. 결혼식은 원래 황혼에 올리는 것이다. 즉 음과 양이 엇갈리는 시간에 올린다. 결혼식은 원래 지금도 마찬가지로 평일 저녁에 올리는 것이 맞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혼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으로 중국말로는 終身大事라고 한다. 사람이 죽기까지 가장 큰일이다. 장가를 잘못가고 시집을 잘못가면 인생은 끝이 난다고 한다. 이것은 살아있는 가례로 喪이라는 것은 사람이 죽었을 때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처음에 빈례가 있다. 사람이 죽자마자 빈소를 차리는 것이 길례이다. 죽자마자 사람을 자기 마당에다가 썩힌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자의 葬(장사지낼 장)은 육일장 구일장의 문제가 아니다. 제후들이 먼 지방에서 올라올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깐 궁중의 마당에 시신을 넣고 썩힌다는 것이다. 옛날에도 길이라는 것은 기본으로 자기집에다 시신을 썩힌다. 이러한 것이 우리나라의 초분과 마찬가지로 낙엽등을 덮어 썩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뼈를 골라 묻는 것을 장례라고 한다(喪禮(상례): 1)殯禮(빈례), 빈소 차리는 예  2)葬禮(장례), 무덤 만드는 예). 요새는 빈과 장이 구분이 되지 않는데, 옛날에는 빈과 장이 엄격히 구분이 되었다. 장례라는 것과 빈례라는 것 모두 상례이다. 그래서 초분을 거치고 이러저러한 것을 하면 대략 삼년상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祭(제)라고 하는 것은 다른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상례를 거치고 나면은 상례는 흉례이지만 제례라는 것은 길례라고 한다. 이것이 무슨말이냐 하면은 사람이 죽고나면은 나에게서 자연히 멀어진다. 부모님도 죽을때는 슬프다. 이것은 흉사이다. "어이 어이"하면서 곡을 해야 된다. 그렇지만 죽고나서 삼년이 지나가면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멀어져간다. 바로 이렇게 멀어져가는 모든 사람들이 조상이다. 즉 가까운 조상부터 먼 조상 모두가 遠(원)이다. 나에게서 먼 자들을 추모한다. 이것을 제례라고 한다. 신종추원이라는 것은 관혼상제중에서 상제를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다. 도대체 이말이 무슨말이고, 우리는 왜 제사를 지내고 사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라는 문제를 전체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종교라는 것은 기독교만 종교가 아니고 이 지구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이러한 종교현상을 총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왜 인간에게 종교현상이 생겨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석해야지만 제사라는 것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종교가 없는 것이 없다. 고대 박물관에 나오는 것들은 무덤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두 종교제식과 관련이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주제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학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종교라는 문제를 풀 길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공통된 것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이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문제이다(종교의 주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이다. 죽음은 곧 유한성의 문제이다.). 나의 생명이라는 것은 유한하고 죽는다. 그런데 이러한 유한한 생명이 이러한 유한성에 만족하면 좋은데, 만족을 못한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은 바로 언어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생겨나서부터 이다. 생각해보자. "아이구 좋아 죽겠네" "아이구 맛있어 죽겠네" "귀여워 죽겠네" 말끝마다 다 죽겠다고 말을 한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는,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 언어생활에 배어있다. 기쁘나 슬프나 인간의 희노애락에 깔려 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언어가 생겨나면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보편화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라는 것이 머리에 안착되는 동시에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어떤식으로든 해결하지 않고서는 못견디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명제가 인간이라는 종족이 언어를 얻으면서 그 대가로 생겨버린것이다. 인간이라는 죽음을 해결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처음에 시간밖에서 해결하는 방법이다. 또하나는 시간안에서 해결하는 방법이다(즉음의 해결: 1)시간 밖에서(beyond time) 기독교,  2)시간 안에서(within time) 유교 ). 천당이 시간밖에 있겠느냐?, 시간안에 있겠느냐? 분명 천당은 시간밖에 있다.  천당이라는 것은 생멸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살고 죽음에 있으면 그것은 천당이 아니다. 천당 천국이라는 것은 시간밖의 세계이다. 즉 인간은 원래 시간밖의 존재였는데, 죽고나서는 원래의 고향인 시간밖의 천당으로 간다는 것이다. 즉 죽는것이 아니다. 이로써 첫번째 방법이 해결된다. 인간의 유한성이 해결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저 밖에서 온것을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있는 것을 영혼이라 하자, 그러면 살아있다라는 것은 영혼이 내 육체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죽음과 동시에 육체가 없어지면서 영혼이 해방되어 하늘나라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간다라는 것이 된다. "That's find solution" 멋있게 죽음이라는 것이 해결되었다. 그러니깐 이러한 방식의 해결이 하나의 해결이다. 이것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모든 고대종교의 공통된 한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안에서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나의 존재는 시간속에 유한하다. 시간속에서 살고 있다. 나의 존재는 유한하지만 유한한 인간의 존재들은 무한하다.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내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연결이 되면은 이것은 죽음이 극복된다. 바로 제사라는 방식은 이 방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시간밖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여기서 죽지만 나는 다시 나의 후손들에 의해서 신종추원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들의 고리와고리로 연결되는 역사는 무한하다. 나는 여기서 결코 죽는것이 아니고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은다음에 나의 자손들은 나를 기억해줄 것이다. 나의 존재에 대한 영속성에 대한 믿음이 생겨난다. 조상숭배(ancestor worship, 죽음을 역사속에서 해결하는 대표적 방식)라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시간내에서 해결하는 재미있는 방식이다. 이것도 하나의 종교이다. 그리고 또하나 죽음을 해결하는 방식이 있는데, individual service 즉 나 개인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collective solution 집단적인 해결방식이 있다(개인적 해결: 기독교 불교,   집단적 해결: 유교). 나 혼자 해탈을 해서 한다. 나 혼자의 업을 해결한다라는 방식이 있고,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있다. 집단적인 방식과 개인적인 방식이 있는데, 대개 기독교나 불교는 개인적인 방식이고 집단적 해결은 유교이다. 그러기 때문에 "積善之家, 必有餘慶" [주역] [곤쾌 문언] "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아 돌아가는 복이 있다." 항상 家를 단위로 죽음이 해결된다. 선을 쌓으면 후손들이 잘된다. 조상묘를 잘 쓰면 후손들이 다같이 잘된다. 집단적으로 죽음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외롭게 나만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방식이 있는데, 문제는 모든 종교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영국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 진화론적 사고에 기초하여 모든 학문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라는 유명한 학자가 말하기들 모든 종교는 Ancestor worship of every religion "모든 종교의 뿌리는 조상제사이다." (-스펜서의 [사회학 원리]중에서-)에서 출발한다는 가설이 있다. 사실은 여러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이 여호와 하나님은 야훼라고도 한다. 야훼는 대인 종족의 신이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안된다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그것은 구약의 하나이다. 기독교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다르다. 유대교의 율법속에 갇혀있는 하나님이 아니다(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기독교인게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낡은 약속의 폐기되어야할 하나님이다.) . 그러니깐 모든 종교는 사실은 원래는 다신론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십계명의 첫계명은 "나 외의 다른신은 섬기지 말라!"(너의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대에까지 갚는다.(공동번역) [출애굽기]) 이것은 야훼의 말로 야훼는 분명 다신론자이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많은 신들이 있지만 다른 신들을 믿지말고 나를 믿어라는 것이다.  "내가(야훼) 너희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주고 불기둥을 주고 아론의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를 갈러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왔지 않느냐?" 열두지파들을 모아놓고, 각자의 다른 신이 있지만 지금부터는 나만을 믿으라는 것이다(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 모아놓고 모세가 야훼와 새롭게 계약을 맺는 장면은 [출애굽기] 24장, [신명기] 28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다신론이다. 즉 다신론이 일신론으로 가는 것이다(다신론(polytheism)--->일신론(monotheism)). 일신론의 출현은 지상에서의 권력의 통일과 일치한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절대 일신론이 불가능하다. 제국시대가 와야 비로소 일신론이 되는 것이다(유일신으로의 신의 통일은 항상 지상에서의 군력의 통일과 일치된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유일신은 일을 수 없다. 유일신의 출현은 제국(Empire)성립 이후의 사건이다.). 유대민족에게도 다윗왕조이래로 일신론이 되었다. 모든 구약성서의 기록과 구전문학의 성립이 그 때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가장 강력한 통일왕조를 성립한 진시황때에 와서야 신의 통일된 개념이 생긴다. 上帝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전에는 전부가 다신론이다. 그런데 다신론의 모체는 조상숭배에서 비롯된다. 왜 신에는 족보가 없을 수 없다. 유에메리즘(Euhemerism, BC300년 전후에 활약한 신화작가 유에메리즈의 주장, 모든 神의 계보는 역사적 영웅, 지배자, 종족의 추장, 전사의 혼령에서 비롯된다.)이라고 소위 희랍시대부터 모든 신은 족보를 따지고 들어가면 반드시 인간의 계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추상화되어서 점점 보편적인 신으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多에서 一로 가는데, 一 다음에 제로(0)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에서 제로를 제일먼저 만든것은 인도문명이다. 그런데 그 사실과 일치한다. 일신에서 제로신으로 만든것이 바로 불교이다. 불교는 무신론이다. 불교는 철저한 무신론이다(불교는 절대적 무신론이다. 무신론은 종교진화의 최종단계이다. -콘체-). 애드워드 콘체는 당당하게 불교학회에서 세계의 석학이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하나님이 없어도 불교가 성립한다. 종교라는 것은 이러한 족보중에 하나에 속하는 것이다. 일신론 방식에 택할 수 있고 다신론 방식에 택할 수 있고 제로신 방식에 택할 수 있는 것이다. "제법무아" "제법대공"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더 이상 말 할 것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라는 것은 일신에 대한 이것 자체가 인간을 속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는 이러한 마음을 없애라! 하고 말한다면 불교는 심리학이 되는 것이다(불교는 심리학이다. 그 심리학의 궁극은 멸집(滅執)이다. -도올-).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컨트롤 하느냐, 그래서 근본적인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죽음이 해결된다. 그것이 해탈이다. 말이 된다.
이러한 등등의 문제가 명료하게 인간의 종교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자기가 어떠한 신앙을 갖든지 마음대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어떤 종교를 갖건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의 선택문제에 있어 매우 복잡하게 되어진다. 불교만 해도 제로라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로 제법무아의 어려운 사상이다. 재미난것은 불교의 무아론과 불교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가 있는데, 불교에서 이것과 더불어 나오는 것이 윤회(輪廻, Transmigration, 사람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을 계속 반복한다. 범어로 "삼사라" (samsara)라고 한다.)라는 것이다. 윤회라는 문제는 인간이 죽으면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끝난다 이러면 윤회가 되지 않는다. 죽어도 김용옥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영혼은 김용옥이라는 어떤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래서 그것이 그대로 떠서 가는 것이다. 즉 그 혼이 다른 육체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불교는 무아론인데, 윤회를 인정하면 유아론이 된다. 불교가 이러한 문제를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다(무아론(諸法無我)과 윤회사상은(윤회와 주체로서의 我가 인정됨) 조화도기 어려운 이론적 갈등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제사라는 것은 사대봉사라는 말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이 합해진 것이다. 사람을 눈사람처럼 꽁꽁 뭉쳐진 것으로 본다면, 꽁꽁 뭉쳐진것의 하나는 하늘의 기이고 나머지는 땅의 기이다. 그것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동양사람들에게 있어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인간의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 전신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잘 골고루 섞여 있어서 구분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인간이 살아 있다함은 하늘적 기와 땅적 기가 골고루 섞여 있는 상태이다.).  죽는다는 것을 동양사람들은 하늘적 기와 땅적 기가 분리가 되는 것을 죽는다고 한다. 그러면 분리가 되면 하늘적인 기는 다시 하늘로 가고 땅적인 기는 땅으로 간다. 땅적인 기가 땅으로 가는 것은 바로 무덤으로 모시는 것으로 이것을 상례라고 한다. 무덤으로 모시는 상례의 기본은 땅적인 기를 모신다. 무당들은 하늘적인 기를 다스린다. 땅적인 기가 쇠해 갈적에 동시에 하늘적인 기가 쇠해가면은 이것은 안락사이다. 그런데 지금 도올 김용옥이 자동차에 치여 덜거덕 죽었다고 하면, 하늘적인 기는 가만 있는데 땅적인 기는 밑으로 순간적으로 꺼진다. 이러면 역귀가 되는 것이다. 액귀라고도 말하고 수(재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혼)가 되어 무서운 귀신이 된다. 문제는 하늘적인 기가 죽어 하늘로 돌아간다 했을때, 그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시간밖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하늘적인 기가 하늘로 돌아간다 함은 시간안에서의 일이다. 이것이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 다른 것이다. 윤회라 함은 시간속에서 윤회를 하는데, 이것을 완전히 자기 독립성을 가지고 윤회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이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윤회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도 시간밖으로 나가는 윤회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유교사상은 하늘 기도 땅기가 없으면 별수 없이 흩어진다라는 것이다. 결국은 동양사람들은 영혼의 영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동양인의 세계관은 영혼의 독자적 영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신멸론(神滅論)이라고 부른다.).이렇게 본다면 영속성 즉 아이텐티티 이것의 동일성 체계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동양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늘적인 기가 땅적인 기보다 지속성이 강하다. 그래서 뼈라는 것은 금방 썩지만 하늘적인 기는 지속성이 강해서 대개 4대 즉 120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영혼이 흩어질려면 120년이 걸리므로 이 동안 만큼은 모셔야 한다. 하늘적인 기는 천천히 흩어진다. 유명한 사람은 하늘적인 기가 강해 오래간다. 이러한 사람들은 불천위(不遷位, 4대를 넘어서 영원히 모시는 신위(神位))라고 한다. 퇴계선생같은 분들은 불천위라고 한다. 120년만 지나면 하늘적인 기가 흩어져 버린다. 문제는 하늘적인 기가 살아있는 인간에게 어떤 관계를 갖느냐가 고대인들의 관심이라고 한다. 죽은 영혼이 인간에게 악한 방향으로 작용하면 악귀이고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면 선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사라는것은 어떻게 죽은 귀와 살아있는 인간사이를 어떻게 화해시키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동양사람들에게 깊은 의식을 주었다. 모든 것은 나로 끝나지 않는다. 나의 행위가 자손만만대대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나의 삶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집단적으로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깐 동양사상은 즉, 내가 서서히 죽으면 좋은데, 갑자기 덜커덕 죽게되면 그러면 내몸의 땅이 싹 빠지고 하늘 그 형태로 남아서는 "어! 내 땅은 어디갔냐?" 갑자기 없어져 놀랠것이다. 그래서 하늘적인 기가 놀래 날뛴다. 그럴적에는 반드시 무당을 모셔다 굿을 했다는 것이다(굿은 진혼(鎭魂)이다.). 이광수를 불러다 비나리를 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야 비나리 소리를 듣고 "어짜피 가야 되는구나" 하면서 그 혼령이 흩어진다는 것이다. 사당에 가면은 신주를 모시게 되는데,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네분을 모시는, 즉 4대를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고 나면은 빈례가 끝나고 난 다음에 사당에다가 신주를 모신다. 사당에 있는 사대는 바로 집안이라는 훼밀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뒤뜰 사당에 모셔진 혼들은 한 가족(Family)의 개념에 속한다.). 그러니깐 밖에 나갔더라도 살아있는 어른에게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뒤뜰에 있는 사당에 가서 먼저 절을 한다는 것이다. 옛날의 가옥구조는 뒤뜰에 사당이 꼭 있었다. 가족중 누가 돌아가시면 자기집 사당에 모셔있는 신주가 하나씩 밀려 난다. 마지막에 있는 신주가 완전히 밀려나면은 이것을 매조(埋祖, 사대붕사 후에 신위를 땅에 묻는 제식, 이것은 魄이 아니라 魂을 묻는 것이다.)라고 한다. 신주를 묻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사대를 거쳐서 사당에서 대접을 받는 것이다. 하늘적인 기를 혼이라 하고 땅적인 기를 백이라고 했을 때, 백은 땅으로가는 것이고, 혼은 하늘로 가는 것으로 우리가 이것을 제사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은 재미난것은 동양사상은 어떤 의미로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깐 역사의 역속성의 고리로서, 유한한 생명들의 끊어짐을 연결 시켜주는 것이 귀신이다. 이것이 제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는 연속성이 보장된다(인간의 역사는 귀신들로 인하여 그 연속성이 보장된다.). 그러니깐 이것은 하나의 죽음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혼백의 문제에 있어서 혼이건 백이든 간에 완벽하게 인간의 역사성속에서 시간속에서 해결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기독교에서 혼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백이라는 것만을 역사성을 인정하고 혼이라는 것은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이 플라톤(희랍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론, 이데아는 시간을 초월한 영혼의 고향이다.)의 이데아에서 내려오는 서양사상 희랍사상이 모두 동일하다. 서양사람들은 영혼이라는 것에 독자성을 인정한다. 영혼이라는 것은 역사적 시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곳에 있었고, 인간이라는 것은 항상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이성 영혼은 특별한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이성이라는 것은 초시간적인 특성이 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자꾸만 이 문제에 집착을 한다는 것이다(희랍인의 영혼은 초시간적이다. 그러나 동양인의 영혼은 시간내적이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을 초시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오히려 기독교와 불교가 더 비슷하다. 윤회를 인정하는 한에서는 있어서는 그러하다. 불교라는 것을 굉장히 기독교와 대립되는 종교라고 보는데, 사실 우리의 유교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와 불교는 비슷한 동네에 속한다고 한다(불교와 기독교는 동일하게 초시간적 구원을 추구한다. 유교는 시간내적 구언을 바랄 뿐이다.). 언어적으로도 불교는 샨스크리스트어로 인도 유러피안 랭귀지이다(불교는 샨스크리스트어, 필리어를, 기독교는 히브리어. 희랍어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 두 종교는 동일한 인도유러피안어군의 주부-술부관계속에 배여있다.). 그리고 서양언어라는 것은 희랍어가 되든 히브리어가 되든 이것은 같은 어군이다. 그래서 사유형태가 비슷하다. 불교는 끊임없이 영혼의 굴레를 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윤회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느냐는 것이다(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영혼의 윤회사상으로 간다면 영혼의 독자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 영혼의 다시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다(인도인의 열반, 희랍인의 이데아 유대인의 천국은 동일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세계는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의 세계나 희랍의 이데아나 다 비슷하다. 단지 방식만 서로 다를 뿐이다. 지난 시간에 김성철이라는 학자이야기를 했는데, 이사람이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자기가 묘법연화경(기원전후경에 성립한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 동양문화권에서 최고의 경전으로 대접받았다. 406년에 번역된 꾸미라지바의 27品(1品이 후대에 첨가)이가장 널리 읽힌다.)을 강의하고 있는데, 스님들이 듣는 강의실에서 "불교의 신행의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다고 한다. 불교의 신행의 제일의 목표는 깨달음이다. 성철스님도 깨달음 때문에 그렇게 고행을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일까? 소위 법화경의 방편통에 보면은 부처가 말하기를 "여기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새끼는 다 나가라!" 오천명과 비구와 비구니들과 신자들이 다 나가니깐 부처가 하는말이 "저 놈들이 다 나가니깐 좋다!" 저놈들은 깨닫지 못하면서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 불교의 목표가 깨달음이라는 것 자체가 그것이 잘못된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일시에 해탈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에서 해탈은 기나긴 기나긴 윤회의 세월을 거쳐야만 하는 것인데, 이것을 일시에 깨달을려고만 한다는 것 자체가 위반이다. 불교의 제일의 목표는 윤회의 굴레속에서의 보살행위이다. 보시를 하고 약한자를 도와주는, 저 혼자만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본래 이론에서는 위반이다. 이러한 파라독스를 이해해야 한다. 불교의 신행의 제일의 원리는 깨달음이 아니라,  보살행이다. 그것은 윤회의 굴레에서 더불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종교이다. 그러니깐 부처가 여기서 깨달았다는 새끼들은 다 나가라고 그랬던 것이다. 윤회라는 것은 오히려 불교에서는 해탈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윤회가 있기 때문에 해탈하려는 도덕적인노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윤회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탈이라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 유발된다). 선불교의 약점은 일시에 한꺼번에 나혼자 해탈하고 모든사람들은 깨닭지 못했는데 나혼자 해탈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한다. 그렇게 되서 불교는 윤회론을 포기 못한다고 한다. 바로 윤회론 속에 인간의 도덕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는 극단적으로 가면은 대승불교에서 윤회의 세계자체가 인간의 망념이라는 유식사상까지 나오지만은 불교는 원래 자기의 깨달음이다. 그래서 그 강의실에서 모든 스님들이 탄식을 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스님들은 평생 자기는 못깨달았다는 컴플렉스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종교의 문제라는 것은 초월이라든가 비초월이라든가는 매우 부차적인 문제이다(종교에 있어서 신(God)이 문제는 부차적이다. 서구의 근대정신은 모두 무신론에 기초라고 있다. 무신론은 유신론의 한 형태이다). 신이 없어도 종교는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유교의 핵심적인 사상은 결국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천지라는 우주속에 던져진 하나의 점이고 이것이 인이라는 것으로 삼재사상이다. 하늘과 땅이 내몸에 살다가 죽으면 다시 흩어져 하늘과 땅으로 간다. 기독교나 불교처럼 하늘이 독자적으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주자선생이 심지어 귀신론에서 윤회를 인정하고 인간이 죽어서 영혼이 그렇게 무수한 윤회를 한다면 하늘에 무지하게 영혼이 많아 하늘은 교통지옥이 될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호르라기를 든 귀신이라도 말들어야 한다고 했다(如此, 則天地間, 常只是許多人, 來來去去, 便不由造化生生, 必無是理. -[주자어류] [귀신장]-(여차, 즉천지간, 상지(다만)시허다인, 래래거거, 편불유(말미암을)조화생생, 필무시리.). 주자는 이따위 이론이 어디있느냐라고 말한다. 결국은 기는 다시 모았다가 흩어지고, 흩어지는 것중에서 다시 모아지는 것으로 이것을 취산(聚散)이라 한다(기는 끊임없이 취산한다.). 그러니깐 다음에 어디로 태어날 적에는 나는 흩어지고 나의 억만분지 일이 어디로 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나의 백이 다가는 것이다. 영화 쿤둔에서 먼저 달라이나마가 썼던 물건을 늘어놓고 그것을 집어야만 새로운 달라이나마가 된다.  동양사상인 유교는 그러한 지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기철학적 세계관은 영혼의 지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취산하는 한 고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끊임없이 모여지고 흩어지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에 마음이 편하다. "어짜피 흩어질 인간!" 나의 영속성을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신 동양인들은 歷史의 神을 가지고 산다(동양인의 신은 역사다.). 역사에 누명을 끼치지 않는다 나의 자손들을 위해서....   그것으로서 충분한 종교가 된다. 떳떳한 이름을 역사에 남기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나는 영원하리라!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기독교가 들어왔을때, 동양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에 제우스니티들이 들어왔는데 마테오리치와 도미니카 프란스니카가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마테오리치는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조상제사를 허용하였으나 그뒤로 들어왔던 제우스니티들, 도미니카 프란스니카는 조상제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먼저들어온 제우스니티들과 나중에 들어온 제우스니티간의 파벌싸움으로 복잡한 전례논쟁이 되었고, 1939년에 로마교황청은 조상제사를 공인하였다. 즉 조상제사는 절대 기독교신앙과 배치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각자가 가지는 토착적의례를 천주교의 전레로 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최근에 김수환추기경이 심산상을 받았다. 오늘날의 성균관을 만든 장본인인 김창숙이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근세 유림의 대학자이다.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나중에는 성균관을 건립하고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워 감옥에 수없이 들어가면서도 격이 있는 유학의 본령을 지키신 분이라고 한다. 도올 김용옥이 보기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위치가, 금세기의 위치가 심산선생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다고 말한다. 김수환추기경이 심산상을 받겠다는 것도 대단하고, 받는 겸허한 자세도 존경스럽다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유학의 그러한 법도에 따라 심산상을 받는 사람은 심산의 묘에서 참배하기로 되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절을 두번하였다고 한다.

기독교 정신은 하느님에 대한 효로부터의 下向이고, 유교정신은 인간에 대한 효로부터의 上向이다. -김수환 추기경-

내가 믿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효이고, 이 지상에서의 모든 사람의 효와 사랑을 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내 신념과 여기서 절하는 나의 행위는 절대 배치되지 않는다. 이렇듯 김수환추기경이 보여주는 이러한 이시대의 산정신을 우리문화가 이제는 다시 배워야 한다. 인간의 종교현상이라는 것은 복잡다단한 것이고 이 복잡한 종교를 총체적으로 생각해서 앞으로는 유교다 기독교다 불교다 하는 좁은 신앙의 테두리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각자 자기가 택한 신앙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김수환추기경처럼 그러한 위대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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