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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공자의 예술관 1부 `어울림의 디자인`
 홍기성 
  | 2001·07·15 17:36 | 조회 : 3,228 |
<특강> 공자의 예술관
제1부 어울림의 디자인
최근에 우리철학계에는 상당히 활발한 모임들이 최근에 있었는데, 김재권교수라는 미국철학회의 회장을 지냈던 분과 존 써얼이라는 버클리대학교수로써 얼마전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서울대학교 교수인 김여수선생님과 논쟁이 있었다. 김재권선생의 논의중에 어려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supervinience(수반, 정신이 물질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 토대가 동일한 상태에서는 동일한 정신력 현상이 수반된다는 김재권교수의 독창적 이론.)은 수반으로 번역된다.  데카르트가 말한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서 우리는 정신과 육체가 있다고 믿고 있다. 정신과 육체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가의 문제가 아직도 서양철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인것 같다. 수반론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질적인 여건이 형성되면 항상 동일한 정신상태가 수반된다는 것으로, 수반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것이 모두 물리적인것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물질적인 상태에서는 똑같은 정신적인 상태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만약 의학이 발달하여 사람을 냉동시켜서 30년후에 다시 살아나게 한다면 그때의 정신상태가 냉동하기전의 정신상태와 같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냉동전후의 정신상태가 같다면 수반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라는 것이다. 냉동전과 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정신적인 상태가 모두 물질적인 상태로 환원된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철학에서는 physicalism(물리주의, 정신적 현상도 결국 물리적 토대에서 더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20세기의 사조)이라하여 물리주의로 번역한다. 조금더 크게 말하면 naturalism(자연주의, 물리주의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인다. 자연주의 역시 초자연적인 어떠한 질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자연주의가 된다. 어떠한 정신적인 것이 독립된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뇌신경을 연구하는 의학자들은 인간의 뇌상태에서 인간의 정신적인 상태가 나오는 것으로, 뇌신경의 생리적인 것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으로만 본다면 수반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단적으로 유물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나 과거에나 인간의 정신이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고 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나 인간의 정신이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면 과연 인간은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수반론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 모두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김재권선생은 최근에 수반론에서 더 나아가 환원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김재권선생은 지금 철저한 물리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존 써얼이라는 사람은 그러한 환원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손을 들려고 한다면 손을 들려고 하기 때문에 드는 것이다. 즉 내가 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손을 든것이라고 존 써얼은 말했다고 한다. 김재권선생은 그 손을 든다는 생각이전에 손을 든다는 물리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뇌세포에서 이미 내가 손을 들겠다는 생각이나게끔 하는 어떤 물리적 조건이 있어 수반된 현상이라고 김재권선생은 말했다. 그러니깐 우리가 손을 든다는 자체가 손을 든다는 자체이전에 어떤생각이 아니라 물리적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식으로 말한다면 인간이라는 것은 전혀 물질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존 써얼은 손을 든다면 드는것이지, 손을 든다는 생각을 야기시키는 뇌의 생리학적인 물리적 조건이 선행해야 하는 인과적인 설명은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김재권은 인과는 물리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만 한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지만, 써얼은 인과 관계가 반드시 물리적 관계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이 컴멘트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싸움을 백날 해보았자 결국은 철학은 공허해진다고 했고, 그것을 따져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현재까지 그것이 철학의 중요한 주류가 되어있다고 한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문제가 항상 이원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환원이 되든지간에 이러한 논의를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출발부터가 정신이다 물질이다 하는 것이 이미 언어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출발부터가 다른, 정신이다 물질이다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떠한 개념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도올 김용옥은 氣(기, 기는 동양인의 우주관의 기초개념이며, 그것은 물질(matter)도 정신(mind)도 아닌 새로운 언어적 선택이다.)라고 하자는 것이다. 출발부터 matter냐 mind냐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말이 아니다. 영어의 matter과 mind이고 이것은 너희들의 언어이고 너희들에게는 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개똥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김재권선생과 존 써얼을 놓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아무리 논의를 해봐야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선택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것이다(모든 철학적 주장은 정교한 논리를 가장해도 결국 형이상학적 선택에 불과하며, 일상언어 전통의 맥락속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즉 입장의 선택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도올 김용옥의 氣철학의 출발은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은 전부 디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무도 사람의 코도 길도 모두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디자인에 대해 우리말로 어울림이라는 캐치프레이를 걸었다고 한다. 한국의 디자인의 이념적 기초를 어울림이라고 하여 세계적으로 근래의 몇년동안 강조해왔다고 한다.  기라는 것을 허령불매한 정신적인것은 아니다. 氣라는 것을 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단위라고 쓴다면 氣라는 것은 최소한 시공간적인 연장성(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점유한다는 뜻, 정신은 연장성이 없다.)이 있다라는 것이다. 시공간적인 연장성이 있다면 시공간속에 어떤 부피가 있어야 하는데, 생각이라는 것은 부피가 없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은 최소한 무엇인가 공간을 점유하고 연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물질은 길이가 있고 부피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철학에서는 연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것이 있어야만 우리가 구성하는 세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물을 먹고 있는 것도 물이라는 연장성이 있어 목구멍으로 넘어감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론에서 이러한 것 조차도 물을 먹고 있는것을, 물의 연장성에 의한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감을 하나님이 나를 지금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회의를 한다. 그러한 연장성이 있는 것이라 하면 기라는 것은 하늘과 땅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적인 기는 무형적 기이다. 동양에서의 무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강당을 채우고 있는 빈공간을 무형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실은 공기라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라는 것은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없는 것은 없다라는 것이다(기철학적 세계관 속에서는 진공은 인정될 수 없다. 장횡거(張橫渠)는 정몽(正夢)에서 '無無'(진공은 없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없다라는 것은 없을 수 없다. 무형적인 세계를 하늘적 기라고 하는데, 땅적인 기는 유형적 세계라고 한다. 즉 보이는 세계라는 것이다. 하늘의 無形적 세계는 미세하고, 땅의 有形의 세계는 거칠다(하늘 : 무형의 세계 : 미세한 氣, 땅 : 유형의 세계 : 거친 氣).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은 무엇인가 입자가 미세하고 땅은 거칠다. 그래서 항상 형태를 만든다는 것이다. 氣라는 것은 氣의 종류별로 하나의 氣조차에서도 하늘적 氣와 땅적 氣가 있다. 하늘적인 기를 도올 김용옥의 기철학에서는 혼극(魂極, 기의 정신적 場(장))이라하고, 땅적인 기를 백극(魄極, 기의 물리적 場)이라 한다. 우리가 정신(精神)이라는 말을 쓸적에 엄밀하게 말하면 精이라는 것은 魄이라는 것이고 神이라는 것은 魂에 해당한다고 한다. 지금의 정신이라는 것은 서양언어의 mind라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는 것이다(정신(精神)은 마인드(mind)가 아니라 精(하초)와 神(상초)의 합성어이며, 반드시 몸(MON)전체와 관련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통 정액이니 정력이니 하는 것은 하초와 관련된 정에서 비롯된 말들이다. 그리고 神(신)이라는 상초가 있고, 精(정)이라는 하초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중초가 氣라는 것이다(神(上焦), 氣(中焦), 精(下焦) : [동의보감]의 身形論). 이것이 동양사상에서 나오는 精氣身사상이라는 것이다. 동의보감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精氣身 전체를 氣 하나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라는 존재는 어마어마한 기의 덩어리들이 모인것이며, 도올 김용옥은 이 기의 덩어리들을 society라고 부른다(우라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체는 氣의 거대한 사회(society)들이다.). 중요한 것은 기라는 것은 최소단위라는 말로 쓰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최소단위라는 말을 쓸때 atom이라는 말이 있는데, a(부정을 나타냄)+tom(자르다라는 뜻)으로서 atom은 자를 수 없는 것을 말한다(atom, 더이상 분할 가능하지 않는 최소단위). 서양사람들이 아톰이라는 말을 쓰든 데카르트이래로 실체(substance, 서양철학사의 기본개념으로 우주의 본체를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실체는 자기존재를 위하여 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서양 근세철학은 이 정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말을 쓰든 어떤한 의미에든지 서양사람들은 최소단위를 쓸때, 우주의 최소근본단위는 실체이고 이 실체라는 것은 라이프니찌에 말을 빌리면 창문이 없다라는 것이다. 즉 교섭이 없다라는 것이다. 자기라는 존재를 위해서 자기가 자기를 존재하기 위해서 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주의 가장 본질적인 궁극은 자기가 스스로 자족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실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도 개념적으로 서로 확연히 교섭이 되지 않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서 자주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이 영향을 준다거나 수반 또는 환원이 된다는 것은 물질과 정신이 두개로서 전제가 되어서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동양사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라는 것은 많은 창문이 뚫려 있어, 창문이 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존재들이 서로간에 서로를 교섭한다는 것이다(氣는 서양의 실체가 창문이 없는 것과는 달리, 수없는 창문으로 열려있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기라는 입자로 볼때, 그것을 최소단위로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은 다름아닌 열려있는 이러한 서로 교섭하는 氣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는 고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또는 "나는 나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나 혼자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나라는 존재는 이미 항상 교섭되어 있고 관계되어 있다. 이러듯 끊임없이 교섭되는 것이 氣인데, 氣가 여러 교섭이 되는 것은 왜 그러하느냐하면은 그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항상 그 교섭을 해가면서 무엇인가 그러한 이접적인 서로다른 多者들과 교섭을 하면서  무엇인가 통합된 一者를 만들어가는 것이 기의 삶이라는 것이다(어울림(Oullim)이란 이접적인 多者(disjunctive Many)가 인접적인 一者(conjunctive One)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통합된 일자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이 강의하는 강당에서 모인사람들은 모두 생각도 다르고 집안배경도 다른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강의들 들으면서 모두들 한마음으로 듣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마음으로 모여지는 것이 一이라는 것이다. 多에서 一로 가는 과정을 도올 김용옥은 어울림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도올 김용옥이 강의하는 강당에서 모든 것이 어울려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하게 어울려져서 한마음이 되어 강의가 이루어지면, 그 상태가 계속진행되어 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울림이 되는 동시에 이 강의는 끝이 나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어울림이라는 것은 시작이 있고 반드시 종말이 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사람들은 氣라고 하는 것을 생멸(生滅)이 있다고 한다. 생하여 지고 멸한다. 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멸이라는 것은 멸되어지는 동시에 생의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서로 교섭되어서 어우러지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 우주는 끊임없이 어울리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一者를 생성한다는 것이다(우주의 생성은 끊임없이 새로운 一者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나의 몸이라는 것은 여러 다른 기의 양태로 형성되어 있고, 모든 것이 세부적인 어울림이 있어 나라는 존재가 유지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그렇게 어떤 어울림의 과정에 있고 그 어울림의 과정이 나라고 하는 존재의 어떤 아이텐티(identity, 생성과정속에서 유지되는 존재의 동일성) 즉 하나의 동일성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 아이텐티티가 잘못되면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가고 있다"라는 말을 할 때, 서양사람들에게는 가고있는 것에 앞서서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내가 있고 그래서 내가 간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사람들에게서는 "가고 있다"라는 행위속에서만 내가 있다라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나라고 하는 불변의 선험적 자아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자아가 있기 때문에 내가 걸어간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험적 자아를 파악해 들어가면 결국 하나님에게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내가 가고 있다"에서 주어라는 것이 없어지고 술어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순수한 우리나라말은 주어가 없다라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진지잡수셨어요!" 그러나 영어에서는 "너 안녕하세요!" "당신 지금 잡수시고 계십니까!"가 된다. 우리언어는 나라고 하는 주어가 원칙적으로 우리말에는 없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적 세계관에서 나온 말습관이라고 한다. 주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잡숩고 있는 동안에 잡숩고 있는 주체를 말한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도 말하고 있는 주체로서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에 도올 김용옥이 미쳐서 정신병자로 정신병동에 일년있다 다시 강의실로 온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 그 위대한 김용옥"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뀔 수 있다라는 것이고, 그 때의 나가 지금의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정신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法은 자아가 없다. 불교 삼법인의 제1명제)라는 것이 있다. 제법무아라는 것은 모든 것은 我가 없다라는 것이다. 예들들어 책상도 책상이라는 我가 없다. 책상도 걸터 앉으면 의자가 될 수 있다. 책상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자아가 없어 행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분필도 칠판에 쓰면 분필이지만 만약에 이것을 던지면 무기가 된다.  그 행위 즉 술어만 있고 주어는 없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그런 이것이 근세로 내려오면 디자인의 세계에서 온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한다고 하면, 책상을 디자인 했고 이것을 디자이너라한다면 도올 김용옥은 이것이야말로 개똥이라고 한다. 내가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 사람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라 한다. 내가 이것을 디자인 했다는 말 자체가 나라는 디자이너가 실체로 떨어져 있고 어떤 대상적 세계를 조합해서 작품을 만들었다는 생각 자체가 개똥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디자인 한것은 내가 디자이너가 아니라 내가 이것을 디자인한 동시에 사실은 이것에 의해서 디자인된 측면도 있다.  하나님이 이세계를 디자인 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디자인 했다" 도올 김용옥은 여기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디자인 하고 있다고만 인정한다. 그러나 신은 이 우주에 대해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디자인하고 있다는 행위속에서만 신이다. 이세계는 디자인되고 있다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디자인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디자인되어 있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신은 이 우주를 디자인 한다. 그러나 신은 이 우주의 디자이너가 아니다. 신은 디자인됨 속에 있을 뿐이다.). 이것이 동양적 세계관이 서양과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디자인 운동이 바우 하우스(건물의 집이라는 뜻의 창조적 예술학교, 크로피우스, 끌레, 칸단스키, 피어닝거, 이텐, 모홀리등이 참여, 나치의 등장으로 페교됨)이다.  그르피우스(1883~1969, 독일의 건축가며 교육자, 1928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장, 미국으로 망명하여 하버드대학의 건축대학원을 설립)라는 사람은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사람이었고,  유럽에서 1919년에  바우하우스 운동이 전개되었다. 독일에서 창조적인 여러방면의 예술가들을 모아 창조적으로 정예교육을 시키는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작은 일품공예로부터 건축과 토목이라든가 가구라는 것은 모두가 하나의 디자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바우하우스 이전에는 디자인이라는 것은 부자사람들에 의해 그 사람들을 위해 정교롭게 만들어진 주문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들어오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다양한 소재가 가능해졌다라는 것이다.  철근과 시멘트가 옛날에는 없어 아무리 돌로 고딕성당을 짓는다고 해도 몇미터밖에 짓지 못했었다.
유리같은 소재가 산업혁명이후 대규모로 들어오면서, 유리라는 것은 물리적인 차단은 되지만 시각은 통과된다는 것으로 창호지라는 특별한 의미는 시각은 차단되지만 우리가 말하는 氣는 통한다는 공간적인 간격은 생기지만 氣는 통한다라는 것이다. 유리같은 소재가 20세기에는 혁명적인 소재라고 한다. 이런 재료들이 나오면서 건축개념이 변하였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후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테크놀로지와 아트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즉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대량생산이라는 테크놀로지라는 것은 별것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루피우스라는 사람은 여기에 착안하여, 그러한 대량생산되고 대량생산되는 것이야 말로 20세기에서 우리삶의 예술의 대상이라는 했다. 그래서 테크놀로지와 아트를 결합시켰다(바우하우스의 정신은 테크놀로지(Technology, 기술)와 아트(Art, 예술)를 융합시키고, 순수미술(fine)과 응용미술(applied)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장인의 세계(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장인의 세계는 천시되었다.)와 아티스트의 이분법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바우하우스는 장인(craftsman)과 예술가(artist)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루피우스가 처음 바우하우스를 만들면서 한 말이 있다.
The artist is a heigftened manifestation of the craftman,   Let us together create the new buliding of the future which will be all in one! architecture and scuipture and painting.  -바우하우스의 창립선언문-
예술이라는 것이야 말로 장인의 지고의 표현이다. 이제는 장인과 예술가사이의 거만한 장벽을 걷어버리자, 페인팅이라든가 아퀴텍춰라든가 조각가라든가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새로운 예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우하우스의 정신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의자도 바우하우스에서 만든것이고, 우리가 한샘에서 만드는 싱크대도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된것이라고 한다. 부엌이라는 것도 옛날에는 집밖에 있었다.  지금은 부엌이 안방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부엌이 밖에 있어 여자들의 세계가 집안과 떨어졌다고 한다. 여자들이 밥을 차려가지고 퇴마루로 해서 안방으로 가지고 오는 수고는 죽을 맛이라고 한다(마당굿에서 조왕신제사는 격절된 여자들의 부엌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부엌이 아궁이가 있어서 낮을 수밖에 없지만, 여자들이 사는 세계는 낮은 부엌의 세계이고, 남자들은 높은 안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안방과 거실을 들어서면서 부엌이 집안의 센타로 들어왔다. 그래서 여자들이 많이 편해졌다고 한다.  디자인이 바뀌면서 인간의 삶의 양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엌의 구조를 바우하우스에서 만들었다는 것으로 서양에서도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우리도 근세에 와서 가장 많이 바뀐것이 부엌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디자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디자인이 인간의 행위를 유발시킨다는 것이고, 인간의 삶의 양식을 바꾼다는 것이다(어포던스, affordance, 행위유발성, 디자인은 인간의 행위를 유발시킨다는 개념.).
만약 공간이 있고 벽이 생기면 공간이 갑자기 분활이 된다. 공간의 변화가 생긴곳의 벽에 농구대를 붙이면 애들이 농구를 한다고 몰려들것이다. 이것 하나 때문에 엄청난 엄청난 행위가 유발된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해주면 디자이너들이 이세계를 창조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내거는 말이 Form follows function(형태는 기능에 종속된다.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모토) 이다. 이것이 20세기 바우하우스의 그 유명한 기치이다.
이것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는 목욕탕이 있다. 물이 빠지는 구멍이 바닥에 있고, 물을 넘치지 않게 하는 배수관이 목욕탕 언저리에 뚤려 있다. 우리가 목욕탕에 앉아 있으면 무릅이 나온다. 이것은 서양의 목욕습관에서 나온것이라고 한다. 서양사람들은 때를 벗긴다라는 개념이 없다고 한다(때를 벗기는 습관은 이 지구상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때를 벗긴다라는 것은 우리의 표피조직에 있어 가장 외곽층을 벗긴다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서양사람들의 목욕은 비누로 슬쩍 닦는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를 벗겨야 하기 때문에 뜨거운 물에 몸을 잠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몸을 담거서 때를 벗겨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욕조는 한없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일본만해도 이러한 욕조가 없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스페이스를 줄여 네모로 욕조를 깊게 만들어 다리를 꼬아 앉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목욕탕 욕조의 언저리에 물을 넘치지 않게 배수구를 뚫어 놓았다. 가뜩이나 무릅이 나와서 불편한데 왜 물을 버리느냐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은 밖에 카페트가 깔려 있어 물이 넘치면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욕탕바닥에 배수가 있어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다.
전혀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목욕을 한다면 우리 몸의 기능이 있다. 생활의 기능을 욕구시켜주어야 할 것인데, 이러한 우리몸의 기능에 형태가 따라야 하는데, 형태에 기능이 따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면 지금의 목욕탕의 욕조의 형태는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다. 바로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디자인에 그 희생물로 불편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길거리에 지나가면서 누가 아무런 이유없이 칼로 쑤신다면, 우리는 그 행위에 대해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올 김용옥은 길거리를 지나다가 형편없는 건물을 보면 심리적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도덕적 분노(moral indignation) 못지 않게 심미적 분노(aesthetic indignation) 또한 삶의 고귀한 가치다.). 우리가 건축가들에게 돈을 다 바치면서 왜 그렇게 불편한 집을 짓고 있느냐는 것이다. 옛날 건축만 가볍게 봐도, 건축구조에 지붕의 구조는 두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맛배지붕과 둥근런 원뿔의 지붕이 그것이라고 한다. 맛배지붕에 기와를 올려놓건 초가를 올려놓건 따지고 보면 맛배지붕과 원뿔지붕의 두 구조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건축이라는 것이 간단하다고 한다. 지붕의 구조는 비를 피하면 되는 것이다. 옛날에 맛배지붕해서 기와집을 만들고 추녀를 만들고 축대를 쌓아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올리면 그 마루밑은 공기가 통했다고 한다. 이러한 집이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비가 많이 와도 습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축대를 쌓아 그리고 그위에 마루를 올리면 그 밑은 공기가 통하여 장마때도 습하지가 않다라는 것이다. 옛날집 제대로만 지어도 물이 새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아무리 훌륭한 건축물이라도 장마때 비가 많이 오면 팔구십퍼센트는 비가 샌다는 것이다. 건축에 있어 우리의 삶의 기본이 해결되어 있지 않다라는 것이다. 옛날만 못하다라고 한다. 옛날에는 최소한 축대로 쌓아 집을 올리면서 비가 새는 것을 해결했다. 기본이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러한 썩어빠진 디자인이 우리의 삶을 해치고 있다. 20세기의  Form follows function이라는 것은 엄청난 아퀴먼트라고 한다.  형태가 기능을 따라한다는 주장은 21세기로 오면서 세계의 디자인학계가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바우하우스를 극복하는 것이 포스트모던니즘의 과제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모든 이들이 modernism(근대)을 모르면서 post-modernism(탈근대)을 말하고, construstion(구성)을 모르면서 deconstruction(탈구성)을 말한다고 한다. 요새  Form follows function 즉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떠올리면, 의자를 예를 들어봐도 편안함을 주는 의자가 몇개나 되느냐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의자라는 것이 사람의 척주의 커브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몸은 요추와 경추에 고유한 곡선(spinai curve)이 있다. 의자는 이러한 자연곡선에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 허리받침이 푹신한 것으로 되어 우리의 척추의 곡선을 지탱해주지 못한다고 한다. 아무리 근사한 미끈미끈한 가죽으로 만들어도, 결국은 미끈미끈하여 우리의 엉덩이가 앞으로 밀려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삶이 개판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개선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functionalism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무차별 획일화 되었다. 우리가 앉고 있는 의자는 한번 잘못되면 다 잘못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대량생산이 되어서 그렇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Form follows function을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function이라는 것이 획일주의화 무차별화되고 인터네셔널리즘이되어 이것이 국제적으로 가면서 완전히 획일화가 된다는 것이다(기능주의적 디자인이 오히려 단순한 면만을 생각하고 삶의 고유한 기능을 상실해갔다. 인터네셔날리즘:지역간의 고유성이 무시되는 획일적인 무차별주의). 전라도를 가건 경상도를 가건 모두 같아진다는 것으로 이것은 모두 바우하우스에 의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고 바우하우스의 극복을 하기 위해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비판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은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비판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functionalism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면은 어떤 의미에서 동양에서 말하는 用과 體로 말한다면 用속에 體가 있고 말할 수 있다라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體(주어적 세계)는 用(술어적 세계)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생각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로부터 조선유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사상이다.). 그래서 항상 과정속에서 form이 들어난다는 말은 동양사상에 있어서 체용론(體用論)에서 있어 用속에 體가 있다는 이론과 같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 Form follows function이 비판을 받는데, 도올 김용옥은 이것은 비판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정신은 옹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동양사상의 用속에 體가 있다는 것과 일치될 수 있다. 그리고 function이라는 것은 동사적이고 부사적인 세계이고 움직이는 세계이고 동적이는 세계이다. form이라는 것은 주어적이고 명사적인 세계이다. 그러니깐 주어적인 세계가 술어적인 세계로 환원이 될 수 있다면, functionalism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해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생각은, 주어적 세계의 해체를 유발하는 매우 근원적인 해체주의(deconstructionlism)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기능주의는 동양적 사관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기능주의의 본래적 정신은 諸法無我나 변화(生生之謂易)를 말하는 동양적 세계관과 일치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functionalism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적이고 물리적이고 무생명적인 것이 아니라, 바우하우스의 오류는 20세기의 대량복제가 되는 세계속에서 기능이라는 것을 너무 좁게 물질적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기능이라는 것이야 말로 동양적인 생명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functionalism 가장 중요한 것은 구차한 장식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명을 우리가 건설한다고 하지만, 잎파리하나도 탄소동화작용을 위하여 디자인된 것이지 하나님이 이러이러하게 형태를 만들어서 탄소동화작용의 기능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적인 세계는 기능이 앞서고 형태가 따라갈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세계는, 진정한 삶의 기능을 다시 해석해야 되고 이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형태들이 따라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기능을 만족시키면 되지 그 기능을 만족시키는 그 이상의 구질구질한 장식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장식하고 꾸미는 것이 우리 사회를 다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기능은 생명이다. 기능은 생명의 스스로 그러함이다. 기능은 기의 어울림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기능은 디자인이다. 기능은 디자인하고 디자인 되어진다. 기능은 神的이다. 기능은 氣와 理를 매개한다. 기의 기능은 理를 氣로 진입시킨다. 기능은 협애한 목적성의 기계적 속성이 아니다. 기능은 생명의 만족을 달성시키는 과정이다. 기능은 어떠한 경우에도 심미적 목적을 배제할 수 없다. 기능은 아름다워질려고 노력한다. 기능은 삶의 질서이다. 기능이 진정으로 생명력일때, 그것은 장식하지 않는다. 조작하지 않는다. 나뭇잎 하나의 기능도 불필요한 장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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