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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제14강) `안영과 공자`
 홍기성 
  | 2001·07·15 17:33 | 조회 : 4,433 |
제 14강 안영과 공자
자왈: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공자께서 말슴하시었다: "천수레의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매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게하며, 쓰임을 절도있게 하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리는 데는 반드시 때에 맞추어야 한다."
도올 김용옥은 이 장이 공자가 대사부벼슬을 하면서, 공자가 하는 일은 수상의 역활을 하는 총리격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공자가 50~55세때에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했고 이때에 있었던 말이다. 실제로 공자가 노나라에서 정치를 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정치를 했는가에 대한 정치사상이다. 말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道라는 것은 여기서는 導(도)라고 말할 수 있는 "인도한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지만, 道라는 것은 나라를 다스린다의 뜻이라고 한다. 천승지국을 다스릴적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사실 천승지국이라는 규모는 공자의 시대에는 매우 큰 규모라고 한다. 당시 국력을 나타내는 것은 수레라고 한다. 그러니깐 옛날에 보면 한 개의 수레가 있으면 말이 네마리가 있었고 그 앞에 몰이(御, 어)가 있었다. 그리고 양옆에 활을 쏘는 사람이 두사람 있었다. 수레에 사람이 세사람이 탔다는 것이다. 천승이라하면 말 사천마리에다가 사람이 삼천명이라고 한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이러한 사람들을 먹고 재울려면 치중대라고 해서 물자를 수송하는 수레가 천대가 달라붙는다고 한다. 그리고 기병외에 보병이라고 하는 것은  손자병법에 의하면 십만이 따른다고 한다. 그러면은 이러한 천승 즉 수레가 천대가 움직일려면 하루에 천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야 비로서 전역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시대에는 보병의 위치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레대 수레의 싸움으로 보병이 거의 없는 전쟁이었다고 한다. 이 春秋(춘추)시대가 끝나고 戰國(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기병보다 보병전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보병의 편제가 늘어났다고 한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보병 십만이 달라붙는다는것은 전국말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에 올라타는 사람은 말을 몰 줄 알아야 되고 활을 쏠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샛말로 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장교라고 한다. 이 장교가 士라고 한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學優登士"(학우등사, 배우고서 남음이 있으면 벼슬에 올라라. [천지문])를 등사를 선비로 나가라는 것으로 공부를 하다가 장관자리를 가던가 국회의원으로 가든가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옛날에는 國에 나가라는 것으로 벼슬한다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자시대에는 文武(문무)가 분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깐 文官이 곧 武官이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벼슬한다고 해서 중앙부처에 있고 솔져(군인)를 내보낸다는 것이 아니다. 그당시 중앙부처장관은 자기들이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士라는 것이 "禮(예) 樂(악) 射(사) 御(어) 書(서) 數(수)"라는 육예를 익힌사람으로 장교이다. 치중대나 보병들은 民에서 차출된다는 것이다. 옛날에 士民(士는 장교로서 수레에 타는 사람이고, 民은 치중대나 보병에 속하는 졸병이다.)이라는 것은 사라는 것은 교육을 받은 장교이고, 병농일치시대때 특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농사짓다가 호르라기 부르면 전쟁에 가는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점점 갈수록 민병체제가 重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대개 옛날에는 성읍국가로 성안과 성밖을 구분하였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國人이라고 불렀고, 성밖에 사는 사람은 民(庶人(서인))이라고 했다. 공자시대의 성읍국가의 구조가 바로 이러했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국인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후가 되고 그 제후밑에 대부가 있고 그 대부밑에 士가 있다는 것으로 사까지는 성안에 살았다는 것이다. 일반백성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성밖의 들에 살았다. 여기서 가깝고 먼곳에 따라 구분이 있는데, 제일 가생이는 관문이 있어 그곳을 통과하려면 패스포트가 있어야 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國이 천승지국이라는 것은 공자시대에는 대국이었다고 한다. 맹자는 만승지국이라고 했는데, 말을 생산하지 않고 전쟁으로 빼앗아 만승지국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시대에서부터 맹자시대로 가면서 점점더 전쟁체제로 가는것이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는 왜 그렇게 싸우는 역사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여기서 도천승지국으로 나오는 말에서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여기보면 이 세 구절을 소라이(오규우소라이(1666~1728), 정약용보다 일세기 앞선 에도의 유학가, 유교를 참신한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했다.)라는 사람은 일본유학자중에 대단한 에도의 대학자라고 한다. 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 소라이가 [논어]를 새롭게 해석한 문제작)이라고 해서 논어를 새롭게 증명해낸다는 것으로 엄청나게 파격적인 책이라고 한다. 정다산의 주석은 치밀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주자학에 대한 근본적인 존경이 없다고 한다. 즉 주자학은 불교의 아류라고 했다. 고학에서 그렇게 규정했다는 것이다. 주자학에 대한 존경이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소라이의 해석의 입장은, 옛날의 말을 가지고 오늘의 관념을 가지고 해석했다는 것으로 모든 해석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송유(주자)들은 자기생각을 자기체험을 덮어쉬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주자의 말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사람들은 코문지가쿠(古文辭學(고문사학)=古學, 소라이가 주장한 고전해석의 입장)라고 해서 옛말은 반드시 옛말로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소라이는 옛말이라는 것은 선왕지도(先王之道, 육경(六經)은 모두 선왕(先王)의 예악형정(禮樂刑政)을 논한 제도사적 저술이다.)라고 한다. 이 선왕지도는 특이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고문(古文)이라는 것은 요새처럼 인격을 수양하라는 것이 아니다. 옛날 선왕들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전체적인 철학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선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사적맥락에서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한 인간이 "그것은 좋은 말씀입니다"라는 식이 아니라는 것으로, 송유의 불교 선승이 앉아가지고 "아 훌륭한 깨달음이다"라는 식의 똑같은 방법으로 유교를 읽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경전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어떤 구체적인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을 최초로 만들어간 사람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제도를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어떤의미에서 사회과학적인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왕지도를 담아놓은 것이 육경이라고 한다. 육경에 대해 송유들이 제시해놓은 것이 사서이다. 바로 이러한 사서는 오히려 철저하게 육경의 입장에서 육경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인데, 주자는 사서를 가지고 육경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사서보다 육경이 오리지날한 오래된 선왕의 도라는 것이다. 先王의 입장에서 四書를 해석해야되지 사서의 입장에서 육경(六經)을 해석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소라이). 그러기 때문에 육경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인간에게 던지는 교훈이 아니라 당시의 제도사적 정치사적인 사건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천승지국을 해석하기를, 이것은 천승지국을 다스리자는 것이 아니라, 천자가 제후국을 순행할적에 천승지국을 지나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천승지국에 길을 낼적에 최소한 세가지는 지켰다는 선왕지도에 관한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이렇게 다른 우리가 상상 못하는 새로움이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천승지국은 천승지극을 다스리는데 관한 정치철학으로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소라이의 해석은 수용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節用而愛人(절용이애인)이라고 했는데, 쓰임을 절약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했고 使民以時(사민이시)라 하여 백성을 때로 부려라는 것이다. 백성을 때로 부려라는 것은 당시 병농일치시대로서 전쟁이라는 것을 여름에 일으키면 망하는 것이라 한다. 만약에 일으키더라도 농사를 짓지 못해 그 다음해 굶어 죽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반드시 천승지국이라는 것은, 한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항상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이라는 것은 때로서 부려야 한다. 자 이것을 보자 "拙速(졸속)"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다. 졸속 행정이니, 졸속으로 성주대교를 지었다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졸속이라는 말은 원래 병법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졸속에 대비되는 말은 巧久(교구)라고 한다. 拙(졸할 졸)에 반대되는 것은 정교함으로 巧(교묘할 교)가 되고, 速(빠를 속)에 반대되는 것은 오래간다는 뜻으로 久(오랠 구)가 된다고 한다. 정교하게 오래되는 것은 병가지사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故兵聞拙速, 未賭巧之久也. 병가에서는 졸속이라는 말은 있어도 교구라는 말은 없다. -손자-). 그래서 병가지사에서는 졸속이 좋고 교구는 망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군사문화가 많아서 이토록 졸속이 많은것 같다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전쟁에서는 오래걸리는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이미 졌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민을 어떻게 부리냐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소라이는 절용이애인의 人과 사민이시의 民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것이다. 분명 여기의 메세지의 人과 民은 차이가 있다. 人은 성안에 사는 자기들이 거느리는 國人을 말하고 民은 성밖에 사는 庶人(서인)이라고 한다. 敬事而信(경사이신)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제후들의 태도를 말한다고 한다(첫째 구절: 제후에 관한 태도, 둘째 구절: 국인에 대한 태도, 셋째 구절: 서인에 대한 태도). 이것은 소라이가 말한대로 천자가 제후국을 순행하는데 비켜달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보다 포괄적인 공자가 말하는 어떤 중요한 정치사상이라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윗사람을 모시는데, 그 일을 공경스럽게 해야 하고 즉 헛튼말을 하지 않는 실천할 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敬事(경사): 돈보다는 일이 앞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이 공자가 대사부가 되어서 한 일이라고 한다. 모든 국정을 공정되게 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가 실행할 수 없는 말을 한적이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절용이라는 것 또한 공자에게 있어서는 밖에 있는 民은 節(절)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메라! 허리띠를 졸라메라!"라고 지금 말하는데, 국민들이 왜 허리띠를 졸라메느냐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이미 허리띠를 졸라메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고 말한다. 그러니깐 공자가 말하는 절용이라는 것은 자기(공자)가 데리고 있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계급에 대한 말이라고 한다. "너희들은 절용해야 한다. 모든 쓰임을 절약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공자는 말한다. 북한산에 올라가는데 입장료를 받아먹는데, 도올 김용옥은 산적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몇천년의 세월동안 만들어진 길을 계단과 다리를 만드느냐고 말한다. 인사동의 아름다운 자연스러운 동네를 엄청난 돈을 들여 길을 닦고 정비를 하였는데, 완전히 서양동네가 되었다는 것이다. 돈을 들여도 자연스럽게, 길을 유지하기 위하여 흙이 무너지지 않게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게 할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돈은 들이지 않고 그냥 길을 밀어버리고는 생색을 낸다는 것이다. 모든것이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그대로의 것을 북한산에 입장료를 받는 그러한 산적질을 해가지고 북한산의 자연스러움을 망가뜨리냐는 것이다. 왜 세금을 받아서 인사동에 그러한 짓을 하느냐고 말한다. 공자가 말한 절용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공자시대에 공자가 대사부를 하면서 '少正卯(소정묘)'라는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또한 공자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질서가 잡혀갔다. 길거리에 남녀가 유별하면서 다니고, 길거리에 돈이나 물건이 떨어져도 줏어 가는 사람이 없고, 밖에서 성안에 들어오면서 有司들에게 뇌물을 받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라가 질서정연해져 갔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 있는 제나라가 겁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孔子爲政必覇(공자위정필패) 공자가 정치를 하면 분명 패권을 잡을 것이다라고 하여 제나라에서 공작을 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공자가 실각하는 상징적인 글이 있다고 한다. 제나라에서 팔십명의 미녀를 고르고 가장 아름다운 文馬 백이십마리를 노나라의 제후에게 선물로 보냈다(選齊國中女子好者八十, 文馬三十駟, 選魯君 (선제국중여자호자팔심, 문마삼십사(사마 사), 선노군). 노나라의 定公(정공)과 季桓子(계환자)에게 공자가 제나라의 선물을 절대 받지 말라고 했지만 정공과 계환자가 몰래 밤에 나가서 제나라가 보낸 미녀와 미쳐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는 "아 이럴수가 있는가! 이제는 틀렸다. 내말을 듣지 않는구나!"고 말하면서 공자는 노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그 제사에서 나오는 고기를 관리들에게 나누어질때까지만 기다리다가 떠날려고 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낸 고기가 관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도 禮(예)인데 공자에게 고기가 나누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공자는 그래서 이미 틀렸다고 하면서 유랑길을 떠났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 미녀가 말 120마리가 제나라에서 왔어도 노나라의 정치가 잘되어가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공자가 수상노릇을 하다가 떠난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이렇게 보면된다고 한다. 즉 공자가 절용이라는 것은 노나라의 현실을 가지고 노나라의 경제는 농업공동체적인 어떠한 절약경제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제나라에서는 노나라보다 선진국이었고, 제나라는 소비형의 경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소비형의 경제가 노나라의 구조로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경제구조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이 학생시절 한일회담을 그렇게 반대했다고 한다. 끔찍한 망국의 길이라고 생각했었고, 매판자본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자주성이 없어지고 다 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해석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한일회담 이후 우리나라경제가 농촌경제에서 소비중심적인 도시경제로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노나라에 오면서 제나라의 지배체제로 다시 들어가면서 공자가 실각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절용이라는 것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愛人의 愛라는 것은 사랑한다는것이 아니라 아낀다라는 뜻이다. 근세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愛의 뜻이 원래의 아낀다에서 사랑한다는 말로 바뀌었다. 그래서 앞의 節用(절용)과 뜻이 연결된다. 공자가 데리고 있는 국인을 아끼는 것도 사랑하는 것으로 앞의 절용과 의미가 연결이 된다.
공자가 35세전후로 해서 제나라로 간다고 한다. 그 때 제나라의 수상이 안영(?~500BC, 제나라의 사람 제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을 55년간이나 모신 재상, 탁월한 정치가로서 존경을 받았다.)이었다고 한다. 안영이란 인물은 굉장히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제나라의 公은 경공이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의 [열전]에서 백이숙제가 첫번째로 나오고 두번째가 관포지교라는 관중이 나오고 안영이 나온다고 한다(管晏列傳 [사기] 권62, 열전 제2). 그런데 안영이를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이 안영이가 살아있다면 사마천이 안영이의 마부로 들어갈 정도로 존경스럽다고 썼다고 한다. 공자가 제나라로 갔을때, 처음 경공을 만나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었다. 공자는 그 유명한 "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했다. 군은 군다워야 하고, 신은 신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다워야 하고, 자는 자다워야 한다. 그 유명한 공자의 정명론으로 그 이름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제나라에 오니깐 군은 이미 군답지 못하고, 신하는 이미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는 이미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은 이미 자식답지 못하는, 제니라의 정치가 명분에서  이미 어그러져 있음을 지적했다. 그 다음에 공자를 경공이 또 불러 정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政在節財"(정재절재) "정치란 재화의 쓰임새를 절도있게 하는데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마천 [사기]에서 말한 節財(절재)와 논어에서 말한 節用(절용)이라는 말이 같다. 그렇게 본다면, 두 말의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치라는 것은 관료들이 재화를 절약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경공은 공자를 대부로 임명하여 성읍을 녹읍으로 줄려고 했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공자는 제나라의 유명한 정치가로 남았을 것이라 한다. 공자를 대부로 봉할려고 했던 경공을 막은 사람이 바로 안영이었다. 안영은 공자에게 대부로 봉하면 안된다고 말리면서 공자를 욕하는 말이 유교에 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을 다했다고 한다.
"첫째, 저놈들은 말재간이 뛰어나고 융통이 많아 도저히 법으로 다스릴 재간이 없다. 둘째, 거만하고 제멋대로 콧대가 높아 도저히 아랫사람으로 삼을 수 없다. 셋째, 이놈들은 喪禮를 중시하기 때문에(당시 공자에 대한 정확한 비판이라고 한다.), 죽음의 제식을 관장하기 때문에 그래서 집안이 파산해도 장례를 거하게 치루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우리(제나라)의 풍속으로 삼을 수 없다. 너무 예가 많다. 넷째, 도처에 다니면서 후한 관직이나 녹을 바라기 때문에 이놈들에게 도저히 나라를 맡길 수 없다. 즉 盜(도)의 무리로서 유랑벽이 심하다. 다섯번째, 주나라가 무너지면서 禮樂이 유명무실하여 다 붕괴됐는데도 불구하고 이놈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장을 성대하게 꾸미고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고 세세한 행동규범까지 다 규정하고 있으니 몇 세대를 배워도 다 배울수 없으며 평생을 다해도 그 예를 터득할 수 없다. 군주께서 그 사람을 채용하여 제나라의 풍습을 바꾸어 백성을 다스린다면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안영이가 공자를 까는 것을 보면 오늘날 유교에 대한 비판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한다. 기독교인이 따로 비판할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공자는 경공이 자기를 대부로 임명해줄까 하고 경공을 찾아 갔는데, 경공은 "吾老矣, 弗能用也." 아! 짐은 늙었노라!하고 모른체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는 그길로 떠난다. 도올 김용옥은 안영이가 공자에게 나쁜짓을 한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안영은 공자의 최대의 은인이라고 한다. 만약에 공자를 대부로 봉했다면 정자산과 같은 유명한 정치인으로만 남았을 것이라 한다. 오늘날의 공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공자는 그렇게 당하고도 나서 안영을 훌륭하게 보았다. [공야장]에서 안영이를 "그 사람은 오래 대할수록 더욱 공경해진다."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오래 대하면 공경해지지 않고 막 대해진다는 것이다. 안영이 재상임에 불구하고도 그렇다고 공자는 극찬을 했다. 공자는 자기를 깐 사람에게도 훌륭하다면 정확하게 대접을 해준다는 것이다. 안영이 재상으로 있을적에 월석보라는 대단한 현인이 있었는데, 월석보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죄인이 되어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안영이 보고 지금으로 말하면 보석금을 주고 끌러내어 자기 마차에 태워 집에 돌아왔다. 그러고서는 안영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는 인사도 없이 자기 안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안영이 조금있다가 나왔을때, 월석보가 안영이에게 절교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안영이 놀라 의관을 고치고는 물었다. "내가(안영) 당신(월석보)를 존경했기 때문에 여기에 모셔왔는데, 무슨일로 그러십니까?" 월석보가 "남자라는 것은 자기를 몰라주는 사람앞에서는 자기를 숙인다. 그러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앞에서는 자기를 철저히 들어낸다. 그런데 나를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에게는 나를 숨겼는데, 당신(안영)은 나를 알아본 사람이다. 당신이 나를 알아본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안영)을 따라왔고, 나(월석보)의 정당함을 더욱더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나를 데리고 왔으면 나를 예의로 대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노예로 들어가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안영이 월석보에게 사죄의 절을 올리고 항상 상석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영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또하나 고사중에 안영이가 재상이 되어 마차를 타고 가는데, 마부의 키가 180센티이고 안영이는 135센티였다고 한다. 그 마부는 제나라의 재상을 모시는 마부이기 때문에 항상 의기 양양했다고 한다. 그러한 모습을 마부의 아내가 보자, 그 아내는 "나는 당신과 살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부가 무슨이유에서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 아내는 "안영은 비록 육척의 작은 모습으로 재상의 위치에서도 앉아 있는것이 겸손하고 단정한데, 당신은 의기양양하게 폼을 잡고 가는 모습이 부끄러워 살 수 없다! 그래서 당신과 살 수가 없다!"라고 마부를 야단쳤다고 한다. 마부는 자기 부인에게 잘못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안영이 마차를 타고 가는데 마부가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없고 겸손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무언가 변화가 있으니깐 마부에게 물었다. "맨날 의기양양하던 모습으로 마차를 몰더니 무슨일이 있었느냐?"라고 물었고 그 마부는 자기 부인이 이러이러한 말을 했고,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영이 그 마부를 대부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한 번 잘못을 두번다시 하지 않으면 계급이 어떻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부로 맡길 만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인들의 이야기를 깊게 생각하여 반성해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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