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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문화운동의 전환과 새로운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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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07·15 00:37 | 조회 : 2,773 |


 
일상성과 자발성에 기반한 ‘문화기획’을 찾아

 I. 서론

 9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대학문화는 늘상 ‘위기’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혹자는 대학문화에게 과감히 사망선고를 내리기도 했고, 대학문화는 ‘없다’고도 했다. 90년대 들어 대학의 문화지형이 급격하게 변화함에 따라 대학문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나름의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어느 것도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여전히 그 답답함과 위기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어느덧 90년대도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90년대를 문화의 시대니 문화담론의 시대니 할 정도로 문화연구에 대한 관심이 폭발해 왔고, 대중의 문화적인 욕구는 날이 갈수록 급속히 확대되면서 IMF 구제금융 체제 이후에도 그다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된 현상인가?

 이와 같이 문화적 욕구와 담론이 커져가는 시기에 오히려 대학문화가 위기상황에 있다는 것은 양자의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문화가 위기라는 말은 공동체문화, 민중문화로 표상되었던 80년대의 대학문화가 사라진 것에 대한 상실감과,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는 문화자본의 폭주로 인해 숨돌릴 틈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대중소비문화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대학 특유의 문화라고 할 만한 어떠한 정체성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대학문화운동은 이러한 인식 하에서 대중문화를 비판하고 개인화, 분자화되어 가는 대학의 구성원들을 민중적이고 공동체적인 틀 안에 아우르려는 시도들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은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드러내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대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오히려 커져가는 대중의 문화적 욕구의 에너지를 사장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가 실제로도 현재의 대학문화가 위기상황에 있다고 인식한다면, 그리고 어떻게든 이 위기상황을 돌파하고자 한다면, 위기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고 현실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문화운동의 실천방향을 고민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대학문화와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대학문화에 대한 위기담론이 가지는 혐의들, 그리고 현재의 문화운동 방식에 있어서의 한계지점을 분석하고, 대학문화운동이 어떠한 방향의 실천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은 문화적으로 민주적이지 못하다. 80년대의 ‘동의된 민중문화’는 90년대의 ‘민중문화의 강변’이라는 기형아를 출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변화하는 시대/문화적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90년대 대학문화의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II. 본론

 1. 대중문화와 민중문화, 그리고 대학문화

  1) 대중문화와 민중문화


 80년대의 대학문화운동은 곧 민중문화운동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좋은 문화, 정당한 문화의 모델로서 당당하게 제시되었던 것이 바로 민중문화이다. 이에 반해 대중매체 혹은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 유통되는 문화는 대중문화로 분류되면서 금기시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민중문화는 민족주의 문화, 노동자계급의 문화였고, 대중문화는 제국주의 문화, 자본주의 문화였다. 이렇듯 80년대의 민중문화 개념은 대립쌍으로서 대중문화를 상정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의 구도 위에 존재하는 문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로 들어오면서 민중문화는 문득 자취를 감춰 버리고 그 자리에 대중문화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물결이 대학을 휩쓸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중이 즐기는 문화로서의 대중문화가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어졌으며, 대중문화는 어느새 금기가 아닌 이해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성은 발굴하고 존중해야 할 건강함이었고, 대중문화적 취향은 예전처럼 의식화의 과정을 거쳐 민중지향적으로 바뀌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가치있는 문화적 행위로서 이해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갑자기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 즉 민중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이 사라지자 대학은 혼란에 빠졌다. 민중문화는 문화 간의 엄격한 구분과 계급사회 내에서의 이념적 기능이 차별화되는 문화 도식 위에서만 정당성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박명진, 1996)
 
  
2) 다시 대중문화로

 구미의 문화연구가들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크게 두 가지의 대비되는 정의에 의해 상이하게 분석된다. 첫번째는 맑스주의 문화비평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대중문화를 상업적 기제에 의해 생산, 분배되는 부과된 ‘mass culture’로 보는 견해이다. 여기서 ‘대중’은 원자화되어 있고 획일화된 소비자이며 상업적 기제에 대해 아무런 통제력도 가지지 못하고 어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관여도 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두 번째 관점은 노동 계급이나 다른 종속적 하위집단의 삶의 양식과 하위문화적 실천을 연구한 역사가들과 사회학자들의 저작에서 가장 뚜렷이 발전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대중’은 자발적으로 대항적인 영역을 구성한다. 여기서 대중문화는 영화나 TV, 음반산업에 의해 생산되는 인공적인 대중문화와는 다른, ‘진정한 대중문화’로 정의된다. 대중문화는 ‘대중’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장이며, 여기서 그들의 사고와 감정은 문화산업의 왜곡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Bennett, 1986)

 우리 사회의 민중문화/대중문화의 이분법적 구도는 서구식 문화구분의 이론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80년대 민중문화는 위 두 번째의 ‘진정한 대중문화’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람시의 전통에 있는 기호학적 혹은 문화론적 연구의 주류에서 주장하는 대중문화는 비판적 입장의 대중문화론도 배격하지만, 민중문화적 개념의 ‘진정한’ 대중문화론도 배격한다. 양자의 개념 모두가 대중을 수동적 수용자 혹은 창조적 주체로 고정시켜 보면서, 대중문화란 의심할 바 없이 잘못된 혹은 잘된 정태적인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일방적 정의를 내리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어떤 하나의 고정적인 양태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종속적, 대립적 문화가치와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만나고 섞이면서 다양한 혼합물과 조합을 만들어내는 영역으로서 그 대립되는 가치나 이데올로기들은 대중적 경험과 의식의 틀을 만드는 데 좀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즉, 대중문화란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장으로서 서로 대립적이고 갈등적인 경향들이 만나고 관통하면서 문화적 형식들을 조직하는 합류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대학문화의 변천에 있어서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80년대의 민중문화론은 대중문화와의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구도를 상정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 개념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진보적인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문화실천의 산물들을 민중문화라 불러 왔지만,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대중집단의 일상 속에서 소비되는 문화이며,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의 일부분이라고 해야 옳다.(김창남,1998)
 
  
3) 대학 내의 지배문화와 피지배문화

 한 사회에서 지배문화란 다른 문화들과의 싸움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학에서 지배문화는 결국 자본주의 문화이며 문화산업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학 내에서 민중문화가 또 하나의 억압적인 지배문화로서 군림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은 ‘반동적’인 생각일까?1) 90년대의 대학문화가 위기상황에 있다는 말들의근저에는 80년대의 공동체의 민중문화적  가치들이 사라져가고 대중문화가  일방적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대학인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민중문화의 개념은 지금까지도 대학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가 대학에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대중문화를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서로 대립되고 중첩되는 다양한 경향들이 갈등하고 포섭하며 조직되는 공간으로 사고할 때, 어쩌면 ― 암울한 위기상황이 아니라 ― 자기 표현과 문화실천의 욕구가 크게 확장된 90년대는 이러한 욕구들을 기획,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다양한 전복적 실험과 급진적인 재전유 방식을 생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상황이었다. 여기서 민중문화는 그 일부분으로서, 차이를 가진 다른 영역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갈등하고 투쟁하는 하위문화적 개념으로 기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의 운동주체들은 예의 이분법적 도식을 붙잡고 있으면서, ‘대중문화적 흐름’이라고 보여지는 움직임들, 대중의 문화적인 욕구들을 포섭 혹은 치유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거나 배척함으로써 그 에너지들을 대중소비문화의 품에 고스란히 안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대중문화를 어떠한 고정적이고 당위적인 양태의 문화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하고 수많은 차이를 지닌 문화들이 갈등하는 공간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곧 모든 문화들이 차이를 가지면서 동등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바로 학생운동진영에서 오래 전부터 주장해온 ‘끊임없는 논쟁과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는 전제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은 문화적으로 민주적이지 못하다. 80년대의 ‘동의된 민중문화’는 90년대의 ‘민중문화의 강변’이라는 기형아를 출산하였던 것이다.2) 그리고 이것이 변화하는 시대/문화적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90년대 대학문화의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2. 대학문화운동의 전환  - 공간적 사고

  
1) 대학문화운동의 ‘대중’과 ‘대중성’

 대중문화가 하나의 고정적인 형태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은 ‘대중’과 ‘대중성’이라는 용어 또한 선험적으로, 획일적인 방식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대중대통령은 정권교체가 ‘대중(물론 정치권에서는 ‘국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이 원해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말을 하고, 정부와 언론은 ‘대중이 원하지 않으므로’ 지하철 파업을 철회하라고 한다. 이들 용어는 그 종차의 빈 공간을 정치적으로 채우는 방식에 의해서만이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중문화는 ‘대중’과 ‘대중성’의 정치적 생산을 위한 투쟁의 핵심영역이 된다. 즉, 문화운동의 관심사는 ‘대중’과 ‘대중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이들 용어를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서로 다른 사회 세력을 지배 블럭에 저항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정치적 연대로 조직하는 데 유의미한가라는 질문에 천착해야 하는 것이다.3)

 대학에서는 어떠한가? 운동세력에게 ‘대중성’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절실한 것이지만, “대중이라는 개념의 사용을 둘러싼 수많은 기만의 역사(계급투쟁의 역사)가 길고도 복잡했기 때문에” 이 개념은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간 문화운동 주체들은 대중에게 어떤 “고정불변의 성격이나 신성화된 전통, 예술 형식들, 관습과 규범들, 종교성, 세습되는 적들, 이겨낼 수 없는 힘 등을 부과하는”( Brecht, 1974:51) 오류들 ― 이를테면  대학생은 기본적으로  진보적이며, 윤리적이어야  하며, 사회변혁에 복무해야 한다는 식의 규정들 ― 을 저질러  왔다. 이러한  규정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을 고정화시켜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탈주하는 대중의 문화적 욕망의 동선을  따라잡지 못하고 ‘정치적 구호’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대학은 다양한 계급, 성, 세대, 지역, 환경 등 서로 다른 이해와 다양한 차이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또한 대학에서의 대중은 대학이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 규정될 수 있는 집단도 아니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대중은 모든 대학생도 아니고 운동권과 같은 특정 집단도 아닌 동태적인 것이며, 또한 계급적 위치, 그들이 각자 벌이고 있는 특정 투쟁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 다양한 집단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과 다양한 기준에서 구별되기 때문에 그들의 개별적인 실천이 연결될 수 있다면 잠재적으로 통합 가능하고 대중 대 지배 블럭의 관계로 조직될 수 있는 집단들이다. 즉, 문화운동에서 대중은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리 조직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다양한 차이와 욕구를 가지고 있는 대중들이 항시 충돌하고 갈등하는 상상적 공간 안에서 연결고리를 구성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2) 문화시장의 원리

    
- 자체유통의 메커니즘
 이상의 논의와 같이 대학문화라는 하나의 ‘공간’을 상정할 때, 문화주체(문예 동아리, 언론사, 학생회 뿐만 아니라 일정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모든 집단/개인을 의미한다)들의 활동은 그 공간 안에서 적극적으로 대중을 ‘정치적으로’ 규정/조직하고 적대적인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에서 헤게모니를 쟁취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문화시장을 의미한다. 자신의 생산물을 적극적으로 유통시키려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이를 소비할 수 있는 대중을 조직하는 행위로 환원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생산물을 가다듬는 것, 표현하는 형식의 문제 이상으로 ‘고객’을 규정하고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중은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도, 막연하게 위치지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생’이라는 막연한 전체집단을 대중으로 규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브레히트가 말한 바와 같이 진실에 관해 쓰는 것은 소용이 없으며, 그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위해 쓰는 것만이 의미있는 일이다.

 대학문화라는 문화시장에서 문화생산은 그 자체로 다른 생산물(그것이 포함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까지 포함하여)과의 갈등과 투쟁의 장에 뛰어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지배문화의 재생산 혹은 지배문화에의 저항, 구분의 약화와 중층적인 포섭에 연결되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대중을 규정/조직하고 입지를 강화하여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헤게모니를 쟁취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진보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이것은 대중에게 끊임없이 검증받으려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문화의 생산/유통/소비가 대학문화라는 문화시장의 공간 내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자체유통의 메커니즘이 기능할 때, 대학문화는 다양한 차이와 욕구가 끊임없이 충돌하며 절합되고 탈주하는, 그래서 어떠한 형태로도 고정되지 않고4) 변화,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문화운동을 문화물의 ‘생산-유통-소비’라는 단선이 아닌, 이러한 단선들이 중첩되고 절합되는 ‘공간’에서의 운동으로 사고할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3. 대학문화운동의 새로운 실천    - 문화기획

  1) 일상성과 자발성의 문화

 문화를 향유하려는 대학인의 욕구는 이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이 말은 곧 대학문화라는 공간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취향의 갈등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관심 영역도 지금까지 대학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연극, 노래, 문학 등에서 벗어나 영화, 재즈, 락, 춤 등을 향유하는 동아리들이 생겨나면서 다양화, 세분화되고 있다. ‘문화의 다양화, 일상화’라는 이러한 현상은 정치/사회적 변화와 날이 갈수록 팽창해 가는 문화산업, 변화하는 대학인의 세대적 감수성 등과 관련된 것으로, 대학문화운동의 관심사와 실천활동이 달라져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러한 변화들과 관련하여 대학의 문화운동주체들은 이전과 다른 다양한 시도를 벌여 왔으나, 실제적인 효과를 생산하지 못하고 대부분 변화하는 상황을 따라잡기에 급급한 모습들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5) 학내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라고 할 수 있는 대동제를 다시 생각해 보자. 대동제의 가장 큰 의미는 다양하고 전복적인 수많은 문화적 욕구들이 발현되고 충돌하며 뒤섞이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동제가 준비되고 집행되는 과정은 대단히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이기까지 하다. 개막 한 달 전 정도부터 총학생회 또는 단대 학생회에서 ‘정파적 색채’가 담뿍 담긴 대동제의 기획의도와 그 외 몇 가지 아이템이 적힌 문건을 가지고 각 과나 동아리들을 돌면서, 이러이러한 문제의식에 맞는 무엇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 순간 대중에게 대동제는 ‘하고 싶은’ 무언가에서 ‘해야 하는’ 무언가로 변해버린다. ‘하고 싶은’이 ‘해야 하는’으로 바뀌는 순간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화적 욕구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발성’은 사라진다. 욕구나 실천보다는 머리가 앞서게 되며,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칭찬보다는 비판이 더욱 강조된다. 대중들은 움츠러들게 된다.6)

 현재 대학은 여전히 문화적으로 비민주적이다. 상당수의 문화운동주체들이 문화에 대한 편협한 사고로 인해 문화운동의 중요성을 폄하하고 있으며, 문화운동을 고민한다고 해도 예의 단선적인 ‘문예운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대학의 문화운동주체들이 착목해야 할 대상은 획일적인 기조와 방향성을 강변하면서 대중을 포섭, 배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그리고 대중의 ‘자발적인’ 욕구들이 발현될 수 있는 공간과 이들을 연결할 수 있는 통로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2) 일상적인 문화기획적 실천으로

 대학이 단순한 비판적 대중문화 소비자 혹은 하고많은 하위문화적 범주의 하나로 고정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흔히 말하듯 ‘변혁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적 가치에 대한 전형적인 생산지’로서 기능하기를 바랄 때,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을 돌파해 나갈
‘힘’이 필요하다. ‘힘’은 곧 주체이다. 이러한 주체들은 이제 학생회 문화국도 아니고 동아리의 관성적인 주체들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의 문화적 욕구를 표출하고자 하면서 다양한 관심과 활동을 벌여내고 있는, 수많은 차이를 가지면서 산개되어 있는 다변화된 주체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주체들을 ‘공동체’라는 말로 집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차이가 갈등/투쟁하면서 공존하는 폭넓은 공간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특정한 상황과 계기에서 서로 관계맺고 소통할 수 있는 미세한 연결망을 구축하는 것이 대학문화운동의 새로운 실천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을 ‘문화기획’이라는 말로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기획’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듯이 ‘판을 짜는’ 일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적인 흐름들을 필요에 따라 묶어주고 연결해주는 활동을 의미한다. 이는 물론 대단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대학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온 부분의 운동이다.

 대학문화운동을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사고할 때, 먼저 하나의 축으로서 각 영역 혹은 장르에서 스스로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심화되고 지속, 발전되는 종적인 운동을 말할 수 있다. 이 운동은 ‘문예운동’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기도 하며, 현재의 문예동아리들이 어렵지만 소중한 이 작업을 꾸준히 계속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예운동은 대중문화(혹은 대학문화)라는 공간에서 하나의 주체로서 기능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대학문화운동을 전적으로 포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7)

 또 하나는, 지금까지 학생회 문화국이나 문예동아리들의 활동이 미치지 못했던 곳, 여백으로 남아있던 대중의 일상의 재구성과 장르를 넘어서는 기획적 실천, 그리고 교육, 환경, 성정치 등의 주요 운동영역 내에 문화적 패러다임을 구축해나가는 문제들을 포함하여, 대학이라는 공간을 문화의 방식으로 관통하는 횡적인 운동이다. 또한 다양한 표현들과 발언들(문예운동적 활동들을 포함하여)이 충돌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고 연결시키는 운동이다. 이것을 바로 ‘문화기획’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 2년의 한시적 사업을 통한 단기적인 전망으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이며,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에는 학생운동조직의 정파적 이해와 문화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넘어서서 이를 주도적으로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열린’ 사람들의 집단이 필요하게 된다. 명백히 백지 상태에 있는 현재 대학의 문화현실을 생각할 때, 이러한 집단의 구성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8)

 우선적으로 학내의 문화주체들이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학문화운동의 새로운 실천으로서 ‘문화기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를 소극적으로 미루어  두기에는 현재의 대학이 ‘위기상황’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일상성과 자발성에 기반한 ‘문화기획’을 찾아
  
 현재 대학문화운동의 관건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일상화되어 가는 대중의 문화적 욕구의 에너지를 급진적인 ‘문화실천’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획일적인 잣대나 대학에 대한 포괄적인 규정으로써 대중의 취향을 재단해서는 안 되며, 기본적으로 문화의 다양함과 동등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문화에 대한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끊임없이 부딪히는 문화들에 대해 냉철한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 다만 기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 공존의 원리들을 지켜나가면서 누구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문화적 취향들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충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문화운동은 쉽게 말해서 ‘좋은 문화’를 찾기 위한 운동이며, 대학문화운동은 ‘좋은 문화’를 대학 내에 만들어내기 위한 운동이다. 그렇다면 ‘좋은 문화’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문화운동은 정치운동과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대학에서 문화운동은 정치운동과의 명확한 선긋기 하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충실하게 고민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 문화비평가는 ‘문화정치’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지만, 현재의 대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문화운동적 사고’가 아닌가 한다.
 
<주>
1) 매년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새내기 새로 배움터’(새터)를 생각해 보자. 새터는 대학문화에 적응시킨다는 미명하에 신입생들을 ‘의식화’시키려는 갖가지 프로그램들로 구성된다. 신입생의 세대적 특징과 문화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발굴하려는 프로그램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배타적인 문화행사는 결국 ‘동조하는 자’와 ‘동조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자’의 두 부류만을 낳게 될 뿐이다.
2) 녹두거리의 「태백산맥」 인테리어를 ‘세련되게’ 바꾸었을 때 사람들은 ‘태백산맥마저…’하면서 개탄했다. 그리고 ‘비누방울 혹성’이라는 노래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 들어오던 사람들은 상업적인 대중가요가 들린다고 하여 등을 돌렸다. 「태백산맥」만큼은 ‘민중적’인 모습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말만 하고 일 년에 몇 번 과모임이 있을 때에만 태백산맥」을 찾아갈 때 「태백산맥」은 매년 수천만원의 적자를 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3) 대학생을 ‘예비 실업자’ 또는 ‘사회적 노동자’라고 호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4) 어떠한 형태로 고정된다는 것은 그만큼 단순한 형태를 유지하여 지배문화에 일방적으로 포섭될 가능성을 가진다는 의미가 된다. 80년대 민중문화의 급격한 쇠퇴를 생각해 보라.
5) 대표적인 예로 96년의 ‘反대학제’와 97년의 ‘생활문화학교’를 들 수 있다. ‘反대학제’의 경우, 대안적 교육체제 형성에서 출발하여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거부를 통해 개인을 해방시키자는 문제의식은 실제의 모습에서는 기존의 부문계열운동을 다시 포장해서 내놓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97년의 ‘생활문화학교’ 또한 「팍팍한 일상의 틈새내기」라는 슬로건을 걸고 문화의 일상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아내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취미활동 배우기  수준의  행사로 격하되어 버리고 말았다.
6) 98년 대동제를 준비 할 때 여러 동아리에서 ‘이러이러한 공연을 하고 싶은데 해도 되는가’라고 총학생회에 문의를 하였다. 과연 이러한 것들을 총학생회에서 허락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왜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7) 또한 문예운동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문화산업이 이미 오래 전에 문예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지배문화와의 싸움의 접점을 만드는 데 한계를 지닌다. ‘롯데월드’와 같은 대규모 문화산업들, 백화점이나 ‘두산타워’와 같은 거대한 소비의 공간을 생각해 보라.
8)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문화연대회의’라는 기획집단이 논의되고 있으나, 활동 주체의 구성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두레학생문예관’의 개관을 준비하면서 학내의 문화주체들이 모이고 있는데, 이에 많은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 듯하다.
 
<참고문헌>
강내희, 『문화론의 문제설정』, 문화과학사, 1998.
고길섶, 『소수문화들의 정치학』, 문화과학사, 1998.
김창남, 『삶의 문화, 희망의 노래』, 한울, 1991.
김창남, 『대중문화의 이해』, 한울, 1998.
대학문화연구회, 『대학문예의 이해』, 이웃, 1992.
원용진,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한나래, 1996.
이동연 외, 『대학문화의 생성과 탈주』, 문화과학사, 1998.
이진경 외, 『철학의 탈주』, 새길, 1995.
심광현, 『탈근대 문화정치와 문화연구』, 문화과학사, 1998.
정진욱 외, 『대학문예운동의 이론과 실천』, 좋은책, 1992.
존 스토리, 박모 편역,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1995.
토니 베넷 외, 박명진 외 편역, 『문화, 일주, 대중』,  한나래, 1996.
Bennett, T., The Politics of the Popular and popular culture, Open University Press, 1986.
Brecht, B., “Against George Lukacs”, New Left Review, no. 84, March/April, 1974, p. 51.  
 
 
 당선소감 : 김태형 법/4
 대학문화의 이론적 틀 실험해 보고 싶어
  
 이 글은 그다지 새롭거나 독창적인 내용이 결코 아니다. 다만 학내에서 문화운동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적극적인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학 외부의 문화담론은 무성하지만 정작 대학문화를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인 틀이 거의 없다는 것이 가장 답답한 부분이었고, 이러한 답답함과 위기감에서 감히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되었다. 직접적인 활동을 위해 구체적으로 논의하려 했으나 역량부족으로 상당히 추상적으로 흘러 버린 감이 있다. 그러나 대학문화운동에 대한 담론이 거의 실종되어 버린 지금, 대학논문상이라는 기회에 입이라도 열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논의라도 할 수 있는 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빈약한 논리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뽑아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졸업을 앞둔 지금, 그간 고민했던 내용을 조금은 검증 받은 것이라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다. 부족한 부분들은 앞으로 대학에서 열심히 살아나갈 후배들이 채워줄 것이라고 믿는다.

 대학문화운동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대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라 문제를 실험하는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대학의 구성원 누구나 자유분방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서로 충돌하면서, 서로의 정체성에 흠집을 내면서 성장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대학을 이러한 공간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로 대학문화운동이 아닐까 한다.

글 :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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