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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원문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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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07·15 00:52 | 조회 : 3,247 |


중용장구서

 중용은 어떠한 목적으로 지었는가? 자사자가 도학이 그 전하여 짐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지었다.

 대저, 上古의 聖神이 하늘을 이어 인간세의 기준을 세움으로 부터 그 도통의 전함이 유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이 경에 보이는데 “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 하는 것이 요 임금이 순임금에게 전수한 방식이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  정미하고 전일케하여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 하는 것이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수한 방식이다.

 요임금은 한마디는 지극하고 남김없다. 그런데도 순임금은 거기에다 다시 세마디를 더했다. 요임금의 이 한마디를 밝히는 것이 이와 같이 세 마디를 더 보태고 나서야 비로소 더 원의에 가깝게 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그것을 논해본다면, 마음의 혀령한 작용인 지각은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것이 때로는 형기의 사사로움에 의해 생겨나기도 하고 때로는 성명의 바름에서 비롯되기도 하여 인간이 지각하는 바가 서로 각기 다를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혹은 위태하여 편안하지 않고 혹은 미미하고 아득하여 드러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이 형체가 없을 수 없으므로 제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또 본성이 없을 수 없으므로 제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방촌지간에 마구 섞여 있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를 모른다면, 위태로운 것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미미한 것은 더욱 미미해져서, 그 결과 하늘의 보편적인 질서가 끝내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길 방도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정미로운 감각이 있으면 도심. 인심 둘 사이를 잘 살펴 이들이 섞이지 않게 되고, 하나로 전일하게 되면 그 본디 마음의 올바름을 지켜 그 마음의 하나됨이 떠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마음으로 종사하는 것이 잠시라고 끊임없고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늘 한 몸뚱아리의 주인이 되게 하고 인심이 매 순간 도심의 명령을 듣게 하라.

 그리하면 위태로운 자는 편안하게 되고 은미한 것은 드러나게 되어 움직이고, 멈추고, 행동하는 것이 저절로 지나치고 모자람의 차이가 없어지게 될것이다.

 요와 순과 우는 천하의 큰 성인이다.  천하를 서로 전수하는 것은 천하의 가장 큰 일이다.

 천하의 큰 성인으로서 천하의 가장 큰 일을 행하는데 그 주고 받을 때 간곡히 훈계하는 것이 불과 이 네마디에 지나지 않으니 천하의 이치가 여기에 더 보탤게 뭐가 있겠는가.

 이때 이후로 성인들이 서로 이어내려와 성왕, 탕왕, 문왕, 무왕 같은 이의 임금이 됨과 고요, 부열, 주공, 소공 같은 이의 신하가 됨이 이미 도두 이 네마디로써 도통의 전함에 접하였다.

 우리 공부자 선생님 같은 분은 비록 군왕의 위를 얻지는 못했으나 지나간 성인을 잇고 앞날의 배움을 열었던  바 그 공이 오히려 요순보다 더 현명한 데가 있다.

 그러나 공자의 당대에 공자가 요순보다 뛰어남을 직접보고 깨달은 자 중에서 오직 안회와 증삼의 傳이 그 정통적 종지를 제대로 얻었다. 증자가 이 전을 다시 전하는데 이르러서는 비록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다시 얻었지만 자사시대는 이미 성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이단의 이론이 일어났다.

 자사가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지날수록 그 진실이 자꾸만 유실되어감을 염려하였다. 이에 요순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뜻을 근본까지 파고 들어가고 평소 듣던 아버지와 스승의 말씀으로 캐내어 들어가서 다시 실을 꼬아내듯이 펼쳐내어 이 책을 만들어 후학을 가르쳤다.

 그 우려함이 깊은 고로 그 말함이 간절하고, 그 염려함이 원대한 고로 그 풀어냄이 상세하다.

 (중용에 나오는)천명솔성(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 1장)이라 함은 도심을 말함이요, 선을 택하여 굳게 지킨다(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20장)함은 정일을 말함이요, 군자는 때로 맞게 한다(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2장)함은 집중을 말함이다. 요순시대와 자사의 시대의 시간적 차이가 천년이 넘는데도 그 말이 서로 다르지 않아서 합치되는 듯하다.

 옛 성인의 책을 역대로 가려 뽑아서 그綱維(핵심적인 기본구조, 강유)를 파악해내고 蘊奧(학문의 지식이 많고 깊음, 온오)를 열어 보인 방법이 아직 이처럼 명백하고 상세한 책은 없었다.

 이로부터 다시 전하매 맹자라는 걸출한 인물을 얻었다. 그는 이책을 한층 더 명백히 밝혀 先聖의 道統을 이을 수 있었는데 그가 죽고 나자 전할 데를 잃어버려서 우리 유학의 도가 의지하는 바가 언어문자 사이를 넘지 못하게 되었고 이단의 설이 날로 새로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 결과 老佛의 무리가 나오는 데 까지 이르게 되니 그 이치가 더욱 유사하여 진실을 크게 어지럽히게 되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이 중용이라는 책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예기속에 보존) 정명도, 정이천 선생 형제분이 나시매 그 상고할 바를 얻어 천여년 동안 전해지지 않던 그 단서를 이었고,  그 근거할 바를 얻어 노불의 사이비 이론을 배척하게 되었다.

 대저 자사의 고이 이로 인하여 크게 되었지만 또 정씨 형제 두분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중용의 언어에 기인하여 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자께서 중용에 대해 설로서 남긴 말이 전해지지 않고 石씨의 집록한 바가 정자의 제자의 기록에서 근근이 나왔는데 이것으로 큰 뜻은 비록 밝혀졌다고 하나 세부적인 말들이 석연치 않고 제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지어낸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꽤 상세하고 창조적인 견해도 많으나 그 스승의 말과 어긋나고 老佛의 이론에 빠져있는 상황도 또한 간과될수 없다.

 나 희는 어릴 적부터 일찍이 그 책을 받아 읽으면서 홀로 다소곳이 그 내용을 생각하곤 했다. 침잠하고 반복하기를 여러해 계속했다. 어느날 새벽이었다. 홀연히 아! 하고 그요령을 터득함이 있는 듯하였다.

 그런 뒤에야 마침내 감히 여러 사람들의 설을 회통하고 절충하여 우선 중용장구 일편을 정 본으로 정착시켰으니 뒷 날의 군자들의 질정을 기다린다. 그리고 몇몇 제자들이 석씨의 책, 중용집해를 다시 취하여  그 번쇄하고 난잡한 것을 삭제하고 중용집략이라 이름붙여 책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내가 일찍이 기존의 설을 분변 비평하고 취사 선택한 뜻을 기록하여 별도로 중용혹문을 만들고 집략 뒤에다 첨부하여 주었다. 그러고 나니까 중용의 뜻이 마디마디가 분해되고 맥락이 관통하여 상세한 부분과 개략적인 부분이 서로 말미암고 대의와 미세한 뜻이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모든 이론의 같고 다름, 제대로 전해지고 못 전해짐이 자세히 밝혀지고 사방으로 통하여 각기 지향하는 뜻이 명백해졌다.

 비록 도통의 전수라는 면에서는 함부로 자부할 수는 없으나, 그렇지만 초학자들이 혹 취할 만한 게 있다면 먼 길을 가고 높은 곳을 오르는데 작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할 수는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외다.

 순희기유 춘삼월 무신 신안에 사는 주희가 머리말로 쓰다.

 

  중  용

  제 1 장
 하늘이 명하는 것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 이 성을 따르는 것을 일컬어 도라고 한다. 이도를 닦는 것을 일컬어 가르침이라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바에 조심하고 두려워한다. 숨어있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뚜렸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喜怒哀樂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 그것을 일컬어 中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마디에 들어 맞는 것 그것을 일컬어 和라고 한다.

 중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의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큰 뿌리이며, 화라는 것은 천하에서 언제 어디서나 달성되어야 할 길이다. 중과 화의 지극한데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이 각기 바른 위치와 공능을 갖게 되고 만물이 잘 자라게 된다

 제 2 장
 중니께서 말했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을 거스른다. 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로서 때로 맞게 하는 것이요. 소인은 소인으로서 기탄이 없는 것일 뿐이다.”

 제 3 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중용 그것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오래 실천 할 수 있는 자가 드물 뿐이다.

 제 4 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구나.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뭘 좀 안다고 하는 놈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들은 못미치기 때문이다. 도가 밝아지지 않는구나. 난 그 까닭을 알지 . 현명하다고 하는 자는 지나치고 그렇지 못한자는 못미치기 때문이다. 사람치고 먹고 마시는 것을  모를리 없건만 그 맛을 아는 이가 들물다.

 제 5 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 도 그것이 행하여지지 않는구나!”

 제 6 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순은 크게 지혜로운 자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고 평소의 일상적인 가까운 말을 곰곰이 살피길 좋아한다.

 惡를 슴기고 善을 드러 낸다. 그 양쪽 끝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니, 이것이 바로 舜이 순이 될수 있었던 까닭이다.

 제 7 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사람들이 모두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그물과 덫과 함정 가운데로 휘몰아 넣어도 피할줄을 알지 못하고 ,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는 지혜롭다’고 하면서도 중용을 택하여서는 일개월도 지키지 못한다.”

 제 8 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회의 사람됨은 중용을 택하여서 좋은 것을 하나 얻으면 가슴에 꼭 품어서 떠 받들고 결코 그것을 잃지 않는다

 제 9 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국가는 고르게 할 수 있다. 작록도  사양할 수 있다. 서슬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중용은 불가능하다.

 제 10 장
 자로가 공자에게 용기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방의 강을 말한것인가, 북방의 강을 말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이 힘써야 할 강을 말한 것인가?

 너그럽고 부드럽게 함으로써 가르치고, 도가 없는 것에도 보복하지 않는 것이 남방의 강함이다. 군자는 이에 처한다.
금혁을 깔고 자면서 죽는 것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북방의 강함인데, 강자가 거기에 머문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를 이루어도 휩쓸리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가운데 서서 치우치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나라에 도가 있을때는 막혀있던 시절의 뜻을 바꾸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나라에 도가 없을때는 죽음에 이르러도 지조를 바꾸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제 11 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숨어있는 오묘한 세계만을 찾아다니고 괴이한 것을 실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후세에  잘 돋보여서  그에 대해 기술되는 바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군자라는 사람이 도를 따라 행하면서도 중도에 그만두는데,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

 군자는 중용에 의거하여 세상에 은둔하여 알려지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니, 오직 성자만이 이것에 능할 뿐이다.

 이상은 11장이다.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해서 1장의 뜻을 펼쳐 여기에서 끝났다.  이책의 큰 뜻은 지.인.용세가지 達德으로 도에 들어가는 문을 삼았다. 그러므로 책머리에 순임금, 안연, 자로의 일을 예로 들어서 그 내용을 밣히셨으니 , 순은 지하고 안연은 인하고 자로는 용이다.  이 셋 중에서 하나라도 폐하면 도에 이르러 덕을 이루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나머지는 제 20장에 보인다.

 제 12 장
 君子之道 費而隱 군자의 길은 명백하면서도 또한 가물가물 숨겨있다.

 보통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더불어 그 길을 알 수 있다. 허지만 그 평범한 부부의 앎이라도 지극한데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또한 보통 부부의 못남으로도 그 길을 잘 행할수 있다. 허지만 그 평범한 부부의 행동이라도 지극한데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능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보통의 인식을 벗어난 광대한 하늘과 땅의 움직임에 대하여 사람들은 유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라도 그것은 실을 수가 없고 작은 것을 말하면 천하라도 그것을 깰 수가 없다.

 詩경에 “솔개가 날아 하늘에 돌아가고 고기가 연못에 뛴다” 라고 한 것은 이러한 위대한 길이 위(하늘)와 아래(땅)에 모두 명백히 드러남을 은유한 것이다.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의 길은 부부간의 평범한 삶에서 발단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평범한 세계라 할지라도 지극한데 이르면 하늘과 땅에 꽉 들어차 빛나는 것이다.

 右에 있는 것은 제12장이다. 이것은 자사의 마로 전부 1장에서 말한 “도는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끌어내어 펼쳐서 밝힌(申明 펼신) 것이다. 이 밑으로 여덟장은 공자의 말을 잡스럽게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제 13 장
 道不遠人, 人之僞道而遠人,  不可以僞道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는 사람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도를 행할 때는  그것이 멀리 있는 것처럼 한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도를 실천할 수 없다.

 詩경에서 말하기를  “ 아 도끼자루를 만들지 도끼자루를 만들지, 그런데 그 법칙이 먼데 있는게 아니구나!” 라고 했다.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자루를 깍고 있으니, 그냥 한번 홀깃 보면 그 자루의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릴 뿐이요. 고치기만 하면 책망치 않는다.

 忠恕(용서할 서)는 도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 멀지 않다. 자기에게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않으면 역시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라.

 군자의 도에는 네가지가 있는데 나는 한가지도 능하지 못하였다. 자식에게 구하는 바로써 부모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고, 신하에게 구하는 바로써 임금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고, 아우에게 구하는 바로써 형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고, 붕우에게 바라는 바를 먼저 그에게 베푸는 데에 능히 하지 못하였다. 평범한 덕을 행하며 평범한 말을 삼가고, 부족함이 있으면  감히 다해 버릴수 없다. 말은 행동을 돌보아야 하고 행동은 향상 말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그러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이상은 제13장이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은 평범한 부부라도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나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인도 능히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모두 뚜렸하게 드러나는 費의 세계를 말한 것이지만 그 뚜렷함을 뚜렷하게  만드는 까닭은 지극히 은미로운데 있다. 아래 장도 이와 같다.

 제 14 장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군자는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선 부귀한 바대로 행하며, 빈천에 처해선 빈천한 바대로 행하며, 夷狄(이적)에 처해선 이적의 법도대로 행하며, 환난에 처해선 환난스러운 바대로 행하나니, 군자는 들어가서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을 끌어 내리려 하지 않고,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향상 평이한 데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이유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중용의 자세한 해설은 자료마당에 있습니다.
도올선생중용강의[출판사 통나무, 지은이 도올서원재생述, 값 7,500원]의 내용을 가지고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되도록 원문에 충실하여 그 뜻이 왜곡되지 않게 요약정리 하였으니, 읽어 보시고 좀더 깊은 공부가 필요하면 직접 책을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을 몇 년전에 읽어보고 올초부터 3월에 다시 3번을 읽었습니다. 읽을수록, 나이가 들수록 중용의 향기는 점점 더 짙어집니다. 중용이 개념적 지식에 있지 않고 상황적, 심미적, 실천적 사상이기에 더욱 그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중용을 읽어보면 유교를 알수 있고 노장철학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유교와 도교는 서로 말만 달리 했을 뿐, 인간과 문명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위대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바에 조심하고 두려워한다. 숨어있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뚜렸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전후를 극복하고 이 만큼 경제를 일으킨 것은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생각들입니다. 비록 미천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열심히 일했던, 나의 영광이 아니라 모두의 영광을 위해 일했던 아버지들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서구는 자본주의에 맞는 인간상을 정립하는데 1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짧은 기간동안에 자본을 축척하는데 성공했고 올바른 노동관이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얼마전 충북대학교 학생회장을 지냈던 동문이 암에 걸려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중용에서는 인생에 있어 함정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암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함정은 자기 스스로 판 것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강직하다고하지만 결국 암에 걸리면 허망한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이런 함정을 피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환난이 닥치면 우선 자기자신을 뒤돌아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환난이 자기가 만든 상황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환난이 내가 만든 상황일수 있다 생각하면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풀어 나갈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중용은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에 처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대로 건강하면 건강한대로의 사는 방식이 있듯이 고질적인 병이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과는 같게 살 수는 없는 것이고, 건강한 사람이 닭 졸듯이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자의 덕성을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가진것 없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윤리가 있습니다. 사실 불우이웃을 돕는 사람들은 대개 정말로 가진 것 없이 살아온 아주 부지런하고 검소한 사람들입니다.  그 반대로 상류만을 바로보며 한탕주의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진자 또한 가졌다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종부리듯이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소위 있다는 부류들이 고가의 사치와 호화생활 그리고 방탕한 생활 남을 등쳐먹는 사기적 근성이 있습니다. 물론 검소하고 건전한 생활과 소비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군자는 그런 환난속에서도 스스로 얻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군자는 요행을 바라는 일을 삼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평이한 일에 공력을 다하면 새로운 시와 분이 생긴다라는 것입니다.  요행을 바라는 일에 온갖 모험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평이하고 정확한 일에 공력을 다하면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온다는 것을 중용에서 말합니다. 내 처지를 한탄하지 말고 자기의 분에서 최선을 다하면 좀더 나은 기회가 올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때는 막혀있던 시절의 뜻을 바꾸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나라에 도가 없을때는 죽음에 이르러도 지조를 바꾸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이말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 국민의 정권까지 왔다고 역사가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번 선거에서 투표율이 저조하고 특히 젊은층에서 기권표가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첫째 타락한 정치의 환멸과 두번째로 민주라는 이슈의 희석이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 정치를 세우기에는 아직도 험난하고 갈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끝임없는 애정과 관심만이 올바른 정치를 세울수 있습니다.  군사정권시절 민주의 뜻을 세워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는데, 지금에 와서는 가장 기본적인 선거마저 민주라는 이슈가 희석되고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낀다고 포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용은 교육이라는 것에 많은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학생 부모 학교의 삼자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가장 인성의 기본이 되는 교육은 가정교육입니다. 교사가 아무리 체벌을 주고 훈계를 해도 부모가 그 자식의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본다면 그 학생은 교사의 권위를 부정합니다.  “우리 부모도 가만 있는데…..선생이 나를 꾸짖어….”  어린아이가 의자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부모가 꾸짖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아이에게 “의자에 올라가는 것은 안된다”라고 말하면 그 아이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울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는 어른들끼리 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초등학교도 아닌 유아원에서부터 자식의 교육에 손을 뗍니다.  진정한 교육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훌륭한 부모밑에 그 자식은 훌륭한 인품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교육만큼은 훼밀리에서 손을 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중용은 말합니다. 마이크로한것이 매크로한 것과 통한다고 합니다. 가정교육은 바로 이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의 근간입니다. 또한 교육의 목표가 서울대가 된다면 우리의 앞날은 밝지 않습니다. 배우는 과정속에서 그가 무엇을 했고 어떤 가치를 실현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용에서 군자의 덕성은 활쏘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몸에서 그 이유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단순한 기하학적인 중간이 아닙니다. 역동적인 평형입니다. 양극단을 포괄하는 다이나믹한 中인  것입니다. 우리 동아리도 동아리활동과 전공에의 양극단에서 오락가락하면서 결국 남는 것은 허탈감입니다. 동아리활동과 전공을 포괄하는 그래서 나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새로운 가치관 형성과 앞으로 사회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내실있는 동아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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