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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애환과 한을 달래는 신명난 썽풀이 - 남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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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07·15 00:49 | 조회 : 2,918 |


  남사당 ;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예인 집단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떠돌이 예인 집단은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중구매 등을 들 수가 있으며,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첫손에 꼽힌다. 남사당패의 연원이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밝히기에는 남아 있는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그러나 1900년대 초 이전의 서민 사회에서 자연 발생적 또는 자연 발전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 집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같은 집단은 권력주변에 기생하였던 지배계층이 주관한 관노관원놀이와는 달리 그 유지가 어려웠다. 유랑하는 민중 놀이 집단이 먼 옛날에도 있었음을 말하는 기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해동역사>>에서는 이미 신라시대에 인형놀이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고려사>>패행전 전영보전과 <<문헌통고>>, <<지붕유설>>, <<허백당시집>>등에서도 여시 '괴뢰목우회'나 그것을 놀았던 광대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때 그때의 단편적인 기록에 불과 한 것으로 유랑예인집단의 연원까지를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민중의 이해와는 거의 대립적인 입장에서 기술된 문헌들이므로 한결같이 패속패륜집단으로 몰아 붙이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 내용상의 분류조차 못하고 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모가비')를 정점으로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등 여섯가지 놀이를 가지고 일정한 보수없이 숙식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꼭두각쇠란 명실공히 패거리의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 그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다. 조직은 일사분란하여 오히려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엄격한 것이었다. 50명 내외의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는 남사당패는, 그 충원 방법으로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승낙(실은 먹여살릴 수 없어 내주는 것이지만)을 얻어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가출아 등이 대상이 되었고, 어떤 경우는 유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꼭두쇠는 한패거리에 한사람이지만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 두사람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라는 뜻인데,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사전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곰뱅이쇠인 것이다. 곰뱅이쇠가 둘인 경우, 그 하나는 패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먹는 문제를 맡는, 즉 남사당패의 은어로 '밥'이라는 뜻인 '글'의 임무를 맡았다. 뜬쇠란 꼭두쇠의 밑으로 ,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이다. 뜬쇠들은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 놀이의 예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보통기능자)'을 두게 되고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꼭두쇠들의 판별에 의하여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놀이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한가지씩의 재주를 익혀 가열이 되는 것으로, 이들이 가열이 되기까지에는 여장을 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던 점이 특이하다. 또, 이들은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다.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삐리는 거의 전원이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 남사당 패거리 사이에는 이 삐리의 쟁탈전이 치열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몫의 암동모를 가지기 위한 방법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남사다패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 진위, 충청남도 당진, 회덕, 전라남도 강진, 구례, 경상남도 지양, 남해, 북쪽으로는 송화, 은율등지 인데, 그곳에서는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하여서 삐리들의 기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남사당은 서민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지배층으로부터는 심한 혐시와 수모의 대상이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두레가 있는 시기에는 그 마을의 두레기가 들판에서 나부낄 때, 그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갯마루 같은데서 그들의 당기와 영기를 흔들며 흥겹게 풍물을 울리고 무동을 받는 등 온갖 재주를 보여준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지주의 사전 양해를 얻어 패거리를 끌어들인 의사가 결정이 되면 두레기를 흔들어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두레가 없을 경우에는 역시 마을에서 제일 잘 보이는 언덕빼기에서 온갖 재주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곰뱅이쇠 혼자 마을로 들어가 그 마을의 최고 권력자를 찾아 자기들의 놀이를 보아 줄 것을 간청한다. 만약, 마을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가 나면 의기 양양하게 길군악을 울리며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열에 일곱은 곰뱅이가 트지 않는다고 옛 남사당패 연희자인 정일파, 남형수, 양도일, 최성구 등이 회고한 바 있다.

  남사당 놀이가 벌어지려면 날이 어두워 진 다음, 놀이판으로 잡은 넓은 마당에 횃불도 밝힌다. 한편으로 풍물잡이들이 길군악을 울리며 마을의 크고, 작은 골목을 돌면 동네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행렬을 이루면서 길놀이가 된다. 이때 놀이판에는 사전에 줄이 매어지고 덜미(꼭두각시놀음)의 포장과 버나(접시돌리기), 살판(땅재주), 덧뵈기(탈놀음) 등을 연희할 마당 한 가운데에 큰 멍석 5~6장이 깔린다. 여기서 벌이는 남사당놀이 가운데 얼른(마술)등의 종목은 이미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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