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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정의와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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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07·15 00:05 | 조회 : 2,103 |


 
이 자료는 '문화'의 정의, '문화' 일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에 올려 놓았습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 풀어야 할 문제는 의식이나 제도가 아닌, 바로 문화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는 필자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저또한 이러한 방향으로 문화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고 있구요. 하지만 유순하씨의 문화의 속성에 대한 의견은 저와는 좀 다릅니다.
오래간만에 문화에 대한 좋은 글을 구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빌면서.......

 제 1장 왜 문화인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 문화를 문제삼은 나의 이전 저술들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약간이나마 되풀이의 부담을 무릅쓴 채, 문화에 대한 내 관심의 단초부터 다시 적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모두 네 권으로 된 노작 『한국인과 일본인』(한길사, 1995)의 지은이인 김용운 교수는 그 셋째 권인 『같은 씨앗에서 다른 꽃이 핀다』 307쪽에 이렇게 적어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금방 민족의 시대적 문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경제 생활을 하게 되고, 언어·지식·풍속, 그리고 사유하는 형식까지 영향을 받는다. 어떤 천재라도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을 하고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아무도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또 어떤 사람도 기존의 문화와 단절된 상태에서는 그 사람이 지니는 가능성의 일부분마저도 발휘할 수 없다. 문화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안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존의 문화에 규제를 받는 것이다.

 이제부터 차츰 드러나게 되겠지만, 내 정의대로라면, 우리는 온통 문화의 지배 아래 있다. 한 개인의 생애에만 국한해 놓고 보기로 할 때,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교합에 의해 생명으로 잉태되는 것부터 태중생활을 하는 것, 태어나는 것, 자라는 것, 교육받는 것, 교우관계를 맺는 것, 사회생활을 하는 것, 결혼하는 것, 다른 생명의 아비나 어미가 되는 것, 그리고 물론 죽음에 이르는 것까지, 무덤에 묻히는 것까지, 심지어는 무덤에 묻힌 뒤 아직 살아있는 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대우까지, 그 하나하나가 문화에 의해 판단되고, 결정되고, 진행되고, 종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애의 질이나 빛깔이나 생김새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면 반드시 문화에 대해 우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문화에 대해 대충 무관심하다.

 요즘 새 정권 담당자들 입에서도 더러 그런 표현이 나오고 있지만, 이를테면, 우리는 무슨 사고나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재발방지 대책'이 극적인 방법으로 발표되고, 그 내용의 첫머리는 거의 어김없이 '제도와 의식의 개혁'이 된다. 이런 상투성은 실로 줄기차게 되풀이되고 있다. 이제는 어떤 사건이 터졌다 하면 그 다음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지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예상하고, 그리고 또 그다지 멀지 않아 같은 사고나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고, 그러면 또 이전에 본 것과 비슷한 '재발방지 대책'을 보게 되리라는 것까지 그다지 틀리지 않게 예측할 수 있게끔 되었고, 우리의 예측은 그다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곤 했다. 사실을 예측도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졸릴 수밖에 없고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하도 되풀이되어 쉰내가 날만큼 진부하지만 조금 더 예를 들어보자.

1. 문제는 의식이나 제도가 아니다

 '박한상 사건'이니 '김성복 사건'이니 '지존파 사건'이니 하는 패륜사건이 마치 부도덕한 사회의 목을 죄기라도 하듯이 잇달던 그때 우리 언론은 정말 굉장했다. 신문은 여러 면을 할애하는 특집기사를 연속물로 며칠씩 실었고 텔레비젼은 9시뉴스의 3분의 1 이상을 이 사건 관계로 메우면서, 그 분야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긴급 좌담 같은 프로그램도 방영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런 지경에까지 오게 되었는가. 모두 깊이 무겁게 개탄했다. 사회심리학자, 법철학자, 범죄심리학자, 형사문제연구소장, 그리고 작가나 시인이나 철학자 등, 그 분야 전문가들은 여기저기 불러다니며 자신들의 일가견을 표명하기에 또 한바탕 바빠야 했다. 그리하여 발빠르게 도출된 원인과 대책의 방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었다. 원인은 '황금만능주의와 배금사상'이며, 그 대책은 '의식의 개혁'이며, 그 방법은 '인성과 도덕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효실천 국민운동본부'니 '청소년 선도특별기구'니 하는 것들이 서둘러 발족되었고, 어느 대학에서는 명심보감 강의를 시작했다. 그 누구도 이런 대책들의 실효를 믿지않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런 대책들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 출범 초기, 육해공이 공평하게 골고루 터졌다하여 그 형평성이 화제의 대상이 되었던 각종 붕괴나 추락 또는 침몰사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관계자는 문책당하고, 안전점검 강화 대책이 발표되고, '혼을 담은 시공'이니 하는 깃발이 전국의 공사장에서 휘날렸으며, 부실공사방지 결의대회니 궐기대회니 하는 것도 전국 도처에서 열려, 사람들은 비장한 눈빛으로 구호를 외치며 주먹을 쭉쭉 내뻗었다. 그 다음해 벽두에는 깃발이 바뀌었다. '1994년부터는 부실시공 없다'라고. 내 눈에 그 모든 것들은 말짱 헛것 같아 보이기만 했다. 왜냐하면,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이나 제도나 깃발이 아니라 바로 문화였기 때문이다. 시실 그 뒤에도 '단군 이래 최대 부실'이라는 경부고속전철 등 부실공사는 줄기차게 이어졌다.

 해마다 여름이면 민망스러워해야 마땅할 듯한, 그러나 아무도 그다지 민망스러워하지 않는 듯한 풍경들이 우리 시야에 되풀이하여 펼쳐진다. 장마가 시작되어 강물이 붓기 시작하며 텔레비젼 화면에는 거의 어김없이 장마철을 틈탄 공장 폐수 방류 때문에 떼죽음당한 물고기들이 떠올라 온다. 정말 흉칙하다. 그 뒤에 인간의 음험한 손길이 있기에 더욱더 그렇다. 그런 화면에 뒤이어 관계 당국자가 등장한다. 지지난해에는 "24시간 감시체제를 가동하겠다"였고, 지난해에는 "상시 감시체제를 가동하면서 재발시에는 관계자를 엄중문책하겠다"였던 것 같다. 더러는 그 전에 방영했던 필름을 그대로 재생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상황과 그림은 꼭 같아 보인다. 다가오는 장마철에도 물고기들은 불의의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관계 당국에서는 또 특단의 대책을 발표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마철이면 으레 폐수를 흘려 보내는 문화의 굳건한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비단 세도(稅盜)라는 굵직한 관을 쓰게 된 세무직만은 아니다. 체험적으로 볼 때, 국민이 낸 세금으로 먹고살면서 국민의 충복(忠僕)이니 하는 공무원들 가운데 청렴하다 할 수 있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정의 칼날은 언제나 시퍼런데도 공무원 범죄는 차츰 더 늘어 간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사정이니 감사니 하는 모든 대책들은 한갖 정치적 몸짓이나 일과성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공무원의 부정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만한 자리에 있으면서 못해 먹으면 병신'이 되고야 마는 문화의 지배는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백화점이니 다리니 하는 것들이 연거푸 무너지고, 단군 이래 최대의 공사라는 경부고속전철이 단군 이래 최대의 부실이 되면서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은 부실공사밖에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사실은 우리 건설 회사들은 외국에서는 경쟁력 있는 비용으로 아주 좋은 공사를 해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부실공사를 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가 없는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반면에, 외국에서는 부실공사를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촌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제는 그 화두만으로도 쉰내를 느낄 정도로 되풀이되고 있는데도 촌지 관행은 유유한 것 같다. 다음은 어떤 젊은 교사의 고백이다. 학교 절업 후 처음 부임한 학교에서 봉투를 거절하기로 한 것이 다른 교사들에게 알려졌을 때, 저만 깨끗한 척한다든가 니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다음 학기에 전출 신청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의 고백은 이어진다. 그 다음 부임지에서는 봉투를 받아들이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교사의 이른바 교사로서의 양식이 양식 그대로 지켜지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양식을 지켜내기 어려운 문화의 지배체계가 개인의 이성적 의지에 우선할 만큼 굳건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 난국의 모든 책임은 재벌 몫이다. 그런 지탄 속에서 재벌의 구조 조정이니 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다. 이런 관심도 처음은 아니다. 경제가 삐그덕 소리를 낼 때마다 들먹거린 것이 재벌의 구조 문제였다고 할 수도 있다. 노태우 정권 대의 이른바 5·8 부동산 강제매각조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때 정부 의지는 단호했고 재벌은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흐지부지되었다. 김영삼 정권 때도 출범과 더불어 신경제 100일 계획이니 하는 것을 추진할 때 도 재벌은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벌은 그대로였다. IMF 시대를 맞아 재벌은 한번 더 도마 위에 올랐고, 이전과는 물론 달리 어떤 쪽으로든 대폭적으로 바뀌기는 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대로일 것이다. 왜냐하면 재벌은 그대로일 수밖에 없는 문화의 지배가 그만큼 굳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모순을 극복하고 불행한 사건과 사고의 재발을 실질적으로 방지하면서, 그런 사건이나 사고 따위는 발도 붙이지 못할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문화에 관심하여 문화를 겨냥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역사 문화에 대하 대충 무관심한 것 같다. 왜 그럴까? 그 이유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은 문화에 대한 이해의 결여(無知)나 잘못된 이해(曲解)에서 비롯된 듯하다. 아무래도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아야 할 것 같다.

 2. 인간은 문화 앞에서 무력하다

 어느 저명 작가가 쓴, 대충 이렇게 기억되는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에 사는 동생네 자녀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와서 자신의 자녀들과, 그러니까 사촌들끼리 어울리는 장면을 여러 날 동안 바라보고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외모상으로는 닮은 점이 많은 두 집 아이들이 생활 습관은 물론 언어의 표현 방법이나 눈빛이나 사고 방식까지 판연하게 달랐다. 특히 언어 습관이 그랬는데, 조카들은 명확하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쪽인 데 비해, 자기 아이들은 거의 언제나 듣고 있는 편이었고,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가기나 하는 쪽이었다. 그때 작가는 문화가 자기 아이들을 결국은 어리보기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그 중에는 자신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서울과 연변과 오사카와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게 되는 동포들은, 말하자면 같은 종사, 같은 뿌리인데도 서로 다른 종족처럼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그 어감의 차이는 딴판으로 다르다. 내 체험만으로 보자면 사람새나 사람된, 그런 면에서 연변 쪽이 으뜸이었다. 연변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우리 동포학생들은 서울의 대학에서 흔히 보게 되는, 어느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싸가지가 없는,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그런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이쪽에서 당혹감을 느낄 만큼 순직하고 다감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정나미가 똑 떨어지는'대신 오히려 손을 잡아 품에 안고 싶은 진한 친애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차이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묵은 모순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최소한이 삶이라도 버팅겨 낼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해 내기를 사실적으로 바라고 있다면, 의식이 아닌 문화를 문제삼아 문화의 혁명적 개질(改質)을 겨냥해야 한다. 의식은 문화에 의해 지배되고 결정된다. 문화의 사실적인 개질 없이 의식의 개질은 결코 가능하지 않고 우리의 가련한 삶을 유린하려는 모순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인간은 문화 앞에서 무력하다."(A. 크로버)

 그렇다면 문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쉽게 손닿는 수십권의 책을 뒤적거려 보았지만 내가 구하고 있는 답을 냉큼 내밀어 주는 책은 없었다. 대부분의 책들은 대뜸 "문화는"으로 시작되기가 일수였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 무엇에 대한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만 할 듯하여 숨은그림 찾듯 참 여러 곳을 더듬어 보았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전경수 교수가 쓴 『문화의 이해』(일지사, 1994)라는 제목의 책은 첫 줄이 아예 '문화란 무엇인가'로 시작되지만, 그책이 끝날 때까지 '문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답을 내 손에 쥐어 주지 않았다.

 이 분야 학자나 저술가들께서,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 무엇에 대한 정의부터 명확히'를 염두에 두어보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논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 많은 저술에서 문화에 대한 정의는 간과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 하나를 『문화인류학개론』(한상복 외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부, 1993)에서 읽어 볼 수 있다.

 '문화'는 인류학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면서도, 안류학자들간에는 문화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일상용어로서나 또는 전문 학술용어로 '문화'라는 단어만큼 흔히 사용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양각색의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개념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어쩌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처럼 답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 다름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론부터 비유적으로 적어 보기로 하자면, 문화는 여름철의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나 겨울철의 따끈따끈한 호빵 같은 게 아니라 칼이고, 망치다. 손오공의 여의봉이고, 알라딘의 램프다. 문화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장식용 액자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일수도 있고 살릴수도 있는 전능의 신이다. 요컨대 문화는 깃털이나 곁다리가 아니라 몸통 그 자체다.

 3.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생활, 문화인, 문화수준, 문화주택, 문화민족, 문화시설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의 통념에 녹아 있는 문화에 대한 해석은 상당 부분 높은 교양과 광범위하고 깊이있는 지식으로 갈고 닦인 정신적 가치나 현상 쪽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문화는 좋은 것, 가치 있는 것, 향기로운 것, 품격 드높은 것, 아마도 그런 것 같고, 최준식 교수의 최근 저술인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사계절, 1997)도 그 제목이 풍기는 일차적 어감으로 미루어 다분히 자의적(恣意的)으로 헤아려 보건대, 문화에 대한 그런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아래에 적어보게 될 나의 소견대로라면 이 책의 바른 제목은 '한국인에게 바람직한 문화는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 통념적 이해만으로는 원시문화, 원주민문화, 농촌문화, 뒷골목문화, 청소년문화, 음주문화, 향락문화, 매춘문화 같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 문화 항렬(行列)의 다른 낱말들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네 통념에서 이런 쪽의 문화들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그다지 가치있지 않은 것, 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것, 그다지 품격 드높지 못한 것,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것, 그런 쪽의 이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에 대한 논의에 앞서 문화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꼼꼼하게 생각해 봐야 할 듯하다.

 최봉영 교수가 최근에 낸 『한국문화의 성격』(사계절, 1997)에 나와 있는 "인간이 집단적 생존의 기본 단위로서 바람직한 삶을 실현하기 위하여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신념과 실천"이라는 대목은, 내 손에 쥐어진 문화에 대한 드문 정의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정의로써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문화를 설명해 볼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문화는 근본적으로 '신념과 실천'처럼 주체적인 의지가 아니라, '신념과 실천'을 속속들이 가속하는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1930년에 펴낸 『문화의 불안』이라는 저서에서, 문화란 "우리들의 생활이 동문인 선조로부터 멀어져서, 두 개의 목적, 곧 자연에 대하여 인간을 수호한다는 것과 인간 상호의 관계를 규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업과 제도를 의미"한다고 적어 두었고, 나는 이 대목에서 아마도 사흘쯤은 머물렀을 듯한데, 그가 표현하고자 한 바가 도무지 석연해지지 않았다.

 R. 윌리엄스는 1983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문화'를 "가장 난해한 단어 중 하나"라고 전제한 다음, 이렇게 세 갈래로 나눠 정의했다. 첫째,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 과정, 둘째,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 방식, 셋째,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 행위 또는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보다 훨씬 앞선 1965년에 출간된 저서에서는 또 이렇게 정의해 두고 있다. 첫째, 문화는 어떤 절대적 또는 보편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인간이 완벽함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상태, 둘째, 인간의 생각과 경험들이 구체적인 방법으로 다양하게 기록된 지적, 상상적 작업의 유기체, 셋째, 특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묘사. 어느쪽을 택하든 윌리엄스의 이 정의도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우선 이런 정의로는 '심미적'도 '이상적'도 아니고 '완벽함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상태'도 아닌, 하위문화나 저질문화로 분류될 수 있을 문화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문화란 어느 일정한 사회 속에서 학습된 행동과 그 결과와의 통합된 형태로,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에 의하여 나누어지고 전달되는 것"이라는 R. 린턴의 정의 앞에서도 선뜻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지는 않는다.

 문화에 대한 기왕의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있는 내가 궁리해 본 정의는 기왕의 여러 해석들보다 더 포괄적이다. 나는 우선 인간만이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의견에 동감하지 않는 쪽이다. 이미 동물실험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밝혀진 바이지만, 동물의 세계에도 학습에 의해 체득되어 관습으로 굳어지는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조금 유심한 눈길로 살피면 우리 주변에서도 그다지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바깥에서 기르던 개를 집안에서 길러 보면 여러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같은 종(種)일지라도 야생 상태와 온실 상태에서는 그 생태와 자기 표현 방법이 눈에 띌 만큼 다르다. 비둘기 같은 것도 내 집 주변의 비둘기와 서울역 주변의 비둘기는 그 눈빛부터 다르다. 이런 관찰과 궁리를 통해 문화의 절대성을 수긍할 수밖에 없게 된 나는 결론적으로,

 문화란 인간의 사고와 행동과 생활양식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정신적, 물질적 모든 기제 중에서 유전적인 요소를 뺀 일체의 것으로 이해하기로 하고 있다. 나의 이런 정의에는 자연과 사회의 모든 환경적 조건도 포함된다.
같은 씨앗에서 다른 꽃이 핀다.
왜?
토양 때문이다.
식물에게 토양은 인간에게 문화와 같다.

 문화는 인간을 결정한다.
이것은 문화에 대한 긴 고려 끝에 내가 도달한 잠정적 결론들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문화에 관심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문화의 속성 때문이다.

4. 문화의 속성

 앞에서 잠깐 인용한 바 있는 『문화인류학개론』에서는 '문화의 속성'으로서 다음 다섯가지를 적어두고 있다. 1)문화는 공유된다. 2)문화는 학습된다. 3)문화는 축적적(蓄積的)이다. 4)문화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5)문화는 항상 변한다. 특별한 설명 없이도 이해될 듯한 이런 분류에는 문화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고리가 빠져 있다.

 인간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문화에 관심하고 있는 나는 지금 써내려가고 있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문화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정리를 해보기로 한다. 문화에 대해 장님들 코끼리 더듬기식으로 이리저리 궁리해 보는 중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 보면, 생각과는 다른 그림이 되기 십상이겠지만, 그래도 의사 전달을 위하여는 적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1) 문화는 결정한다

 "인간은 문화 앞에서 무력하다"라는 A. 크로버의 단정을 한번 더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과 생활 양식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정신적, 물질적 모든 기제 중에서 유전적인 요소를 뺀 일체의 것"이라는 나의 정의도.

 늑대 소년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자식이 늑대 젖을 먹으며 늑대문화 속에서 자라다 보니까 그 생태적 질서가 늑대와 꼭 같아져서 늑대처럼 네 발로 걷고, 입으로 먹고, 목을 길게 뻗어 올리며 울부짖었다. 시골 사람들은 순박하다. 우리는 대게 그렇게들 이야기한다. 요즘은 시골사람들도 변했어,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연길에 가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연변 사람들, 서울사람들이 다 버려 놨습네다. 연변 사람들 이렇지 않았습네다. 왜 그럴까? 앞에서 이야기했듯, 해외에서는 훌륭한 건축술을 자랑하는 그들이 왜 한국에서는 부실공사밖에 하지 못하는 것일까? 요즘 초등학교 여고사가 늘어가면서 사내아이들도 여자애 같아진다는 근심이 떠돌고 있다. 왜 그럴까? "요즘 우리 젊은애들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늙은 어른들의 개탄만은 아니다. 아직 젊은 아이들도 자기 후배들을 그렇게 매도한다. 왜 그럴까? 사람 눈동자는 백화점 같은 곳에 들어가면 갑자기 멈춰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문화, 때문이다.
문화는 절대적이다. 문화는 인간을,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2) 문화는 유기적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터지면 터진 그곳을 틀어막기에만 급급한다. 그리고 다른 것이 터지면 또 그쪽으로 허둥지둥 쫓아가 틀어막는다. 이른바 땜질 처방의 되풀이다. 땜질 처방이 되풀이되는 한 땜질 처방을 되풀이해야 하는 구멍은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최초에 접하게 되는 문화는 요즘으로 치자면 아마도 산부인과이고 그 마지막은 장의사일 것 같다. 산부인과와 장의사 사이에는, 유치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각급 학교가 있고, 그 뒤에 접하게 되는 직장과,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여러 국면이 있게 된다. 이 모든 국면들은 유기적 생명체로서 서로 굳건하게 이어져 있고 물론 공조 상태다. 그들은 서로 맞물린 자신의 유기적 형제들을 엄호하며 공생을 추구한다. 하나의 사회 체제에서 어느 한 부분만의 건강이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건강하지 않으면 어느 한 부분도 건강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다 썩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는 어느 구석도 성한 곳이 없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다 썩었다는 공론과는 달리, 사람들은 저마다 정의롭기만 하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모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문화는 유기적이다. 이 속성도 절대적이다.

 3) 문화는 배타적이다

 문화는 외부적 압력이나 저항에 대해서는 유기적 공조체제를 굳건하게 하면서도, 자신들끼리는 밀어내며(排他), 버티고 겨룬다(拮抗). 남자문화와 여자문화, 지배문화와 피지배문화, 전통문화와 박래(舶來)문화, 부모문화와 자녀문화, 이렇게 명백하게 상대되는 문화뿐만이 아니다. 모든 문화는 자신의 번영이나 또는 단순한 오기나 자만의 충족을 위해서도 단호히 배타하고 길항하여, 상대방을 종속시키려 한다. 그런 면에서 문화는 철두철미하게 비이성적이다.

 4) 문화는 생식하고 세습한다

 우리가 개탄하는 사회 현상은 차츰 더 나빠져 가고 있다. 매춘이 사회문제가 된 지는 이미 오래지만, 매춘 인구는 차츰 더 늘어가서, 지금은 16세부터 29세까지, 말하자면 매춘 가능 연령대의 여자 넷에 하나나 다섯에 하나는 매춘업 종사자라는 끔찍한 현실에 맞닥뜨려 있는데, 매춘업 종사자가 더 늘어가게 되리라는 데는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요즘 매춘방지법인가 하는 것이 공포되고, 공창 비슷하게 존재하던 사창가가 폐지되어 매춘 조직이 전 국토에 확산되면서 매춘은 바야흐로 창궐 상태가 된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매춘을 개탄하고, 위정 당국자는 그때마다 매춘 근절을 위해 노력했는데, 어찌하여 매춘업 종사자는 이렇게 늘어 가기만 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개탄이나 당국의 노력이 매춘문화 자체의 생식이나 세습 능력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퀴의 생식 능력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제아무리 그럴듯한 바퀴약이 나와도 바퀴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던 공룡이 화석으로 남아있는 현재까지도 영생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 만화로 대표될 수 있는 일본의 저질문화가 문제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일본 만화의 한국 시장 침투 규모가 수조 원에 달해, 이제는 근절하려야 근절 할 수 없을 만큼 번성 상태다. 학원 폭력은 이제는 전담 검사를 배치하고도 불가항력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 땅의 이혼율은 아시아 지역에서는 최고가 되었고, 조만간 북유럽 수준이 되리라 전망하고 있다. 버려지는 노인들은 차츰 더 늘어나, 국가나 사회 기관의 수용 능력을 넘어섰다. 우리가 모두 걱정하여 모든 슬기와 힘을 다 쏟아붇고 있는데 왜 더 걱정해야 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일까? 문화의 생식, 세습 능력은 그만큼 탁월하기 때문이다.

 5) 문화는 저질을 지향한다

 춤은 대별하면 두 종류가 된다고 한다. 배꼽을 중심으로 상체를 많이 움직이는 것은 기원의 의미이고, 하체를 많이 움직이는 것은 성적 쾌락을 의미한다고 한다. 요즘 우리 가요를 거칠게 대별해 보자면 트로트와 랩이 될 수 있을 듯한데, 트로트 가수들은 노래하며 몸짓이 덧붙여질 때 팔을 치켜들고 두 눈을 그윽하게 치떠 연모의 누군가를 응시하는 듯한 경우가 많은데 비해, 랩은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하체를 마구 비벼대기만 한다. 백댄서들의 춤도 요즘은 하체, 그중에서도 성기와 엉덩이 부분이 차츰 더 격렬해지는 듯하다.

 어느 유명 대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들 가운데 노래와 관련되지 않는 대부분의 행사들은 관객이나 청중이 없어 썰렁했고, 아예 막도 올려보지 못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한다. 최근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은 이런 말씀을 했다. 5일동안 수십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폭력과 섹스와 비어들이 없는 영화는 없더라. 비단 영화에서만은 아니다. 비속어는 이제 일상적인 게 되었다. 우리 영화의 역사는 제작자(감독)들의 벗기기 욕망과 심사위원들의 가위질이 서로 버티고 겨루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위질은 조금씩조금씩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이제는 이럴테면 몇 해 전의 잣대를 들이밀고 가위질을 하려 할 경우, 감독들이 들고 있어나는 '창작의 자유 침해'라는 상투적 항변을 감당해 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감독들의 벗기기는 줄기차게 이어질 것이고, 결국은 포르노가 예술로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될 날도 그다지 멀지 않을 것이다(사실은 이미 그렇게 되었다. 스포츠신문 만화나, 마광수, 장정일의 소설이 음란성 시비에 말려들었을 때, 시비 대상을 옹호하던 분들의 빛나던 눈빛과 높은 목소리로 보아 그렇게 생각된다. 그런데 야릇한 것은, 그분들도 사석에서는 옹호하는 쪽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왕따'(왕따돌림)의 비운을 면하기 위한 위선의 여러 행동들 가운데 비속어를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고상함이니 품격이니 하는 것을 입술에 올리면 여지없이 소외당한다. 외래문화 전래 과정에서도 이 속성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많이 들어와 있는 것은 미국 문화일 듯한데, 우리에게 전해져 온 미국 문화는 동부적인 것보다는 서부적인 것, 웨스트포인트적인 것보다는 'GI'적인 것이 압도적이다. 일본 문화의 전래도 그렇다. 그들의 참 괜찮은 면모는 괜한 찬탄의 대상으로나 머물러 있을 뿐, 우리 것은 되지 못한 채, 기껏해봐야 저질 만화나 야쿠자, 관음이나 탐색(貪色) 따위의 역시 저질문화부터 우리 생활 속을 파고들었다.

 문화는 이렇게 줄기차게 저질을, 말초를, 감각을 지향한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 법칙은 문화의 경우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인간의 이성적 노력은 문화의 이런 속성을 아마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

 6) 문화는 맹목적이다

 문화는 만드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문화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산물이다. 이성적인 어떤 의도는 문화를 이룩하는 감성의 단초는 될 수 있다. 문화는 자기 권능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작정 자기류로 감화시켜 버린다. 문화는 그만큼 맹목적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줄기차게 변화해 가는 문화를 무작정 쫓기에 바쁘다. 옷이나 머리 모양의 유행만은 아니다. 풍습이나 사조, 사고방식의 변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 변화가 이성적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하여튼 세상이 모두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자신도 무작정 따르게 된다. "모든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보이다." 플라톤의 이말을 앞장세운 다음, 변화에 대한 이성적 태도로서 우선 그 변화가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분석적인 눈길로 살펴봐야 한다고 되풀이하여 제안한 바 있지만, 사람들은 변화를 무작정 쫓기에 바빠 나의 제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문화의 맹목성은 그만큼 강력하다.

 7) 문화는 모강(慕强)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 하면 가랭이가 찢어진다. 이 속담은 문화 쪽에서도 그래도 적용될 수 있다. 저 대책 없는 모서(慕西) 경향부터, 빈자의 부자흉내, 여자의 남자흉내, 아이의 어른 흉내 따위까지, 문화는, 결국은 열등감에서 줄기차게 강한 것을 그리워하고(慕), 쫓아 구하면서, 열등한 입장을 굳힌다. 물론 이 경우, 강약이란 이성적 입지가 아니라 물리적 입지다. 모강은 사대(事大)와 다르다. 모강은 사대보다 자조와 상대방에 대한 경멸도가 더 큰게 그렇고, 사대에는 얼마만큼이나마 실리를 추구하는 이성적인 면모가 있는 반면에, 모강은 거의 철두철미하게 정서적 경도라는 점도 그렇다.

 8) 문화에는 우열이 있다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는 게 정설인 듯한데, 내가 정의하는 바의 문화에는 우열의 분별이 분명하다. 내가 정의하는 바의 우성문화란 해당 문화권에 사는 보편적인 사람과 그 사람이 누리는 삶의 질을 우아하고 향기롭고 촉촉하게 만드는 반면에, 열성문화는 해당 문화권에 사는 사람과 그 사람이 누리는 삶의 질을 천박하고 추악하고 메마르게 만든다. 문화의 우열은 물질적, 경제적 우열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런 소견을 간직하고 있는 내게 문화의 보편주의와 상대주의, 또는 문화의 보편성과 상대성에 대한 논쟁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이분법으로 보인다. 문화는 둘로 딱 잘라 나위 볼 수 있을만큼 간단 명료하지 않다.

<출처> 유순하, 한국문화에 대한 체험적 의문 99. 한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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