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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탈춤은 왜 추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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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07·15 01:05 | 조회 : 4,446 |


  
(1) 묵은 『공화국』시대의 회고

  오늘날에 이 지극히 속악(俗惡)하고 추악한 시대에 왜 우리들은 탈춤을 추어야 하는가? 도무지 신명스럽지 못한 이 삭막한 세기의 끝에서. 그리고 새로운 해라곤 뜰 것 같지 않은 내일의 세기의 시작에서. 노래방으로 족한 사람도 많은데, 골프채 휘드르는 재미와 세상 돌아가는 운세를 맞바꿈할 「좀내기」들도 적지 않을테데. TV의 쇼 한방이면 그야말로 세상 시름 못내 잊을 축들도 수두룩할게 아니던가. 한데도 놀이라고 하필 골라서 굳이 택해서 탈춤이란 말인가. 그게 웬 말인가. 탈전통하고 폐고향하여서 얻은 동냥이 만불이라고 했다. 마을 고살 양회(洋灰)로 도배하고 짚집 헐어젖힌 자리에 블록벽 쌓는 것으로 대표도리 게 우리 옛 고장의 겪은 이른바 근대화다. 그렇다 치면 동내 새마을 회고나 앞뜰에서 양춤이나 추어야 앞뒤가 맞아 떨어질 게 아니던가. 그런데도 탈춤이라니! 참말이지 억장 무너질 일이다.

  그건 개인적인 기호탓인가?

  그건 세상 돌아가는 꼴 거꾸로 돌려 세우지 못한 이들의 무슨 청개구리 심보의 발동이던가.

  그건 명절날의 임시방편의 귀성같은 뒷걸음질이던가. 그건 전통을 되살리자는 객기 탓이던가. 탈춤놀이에 게걸든 사람들로서는 더러는 이 물음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 격에 맞는 것으로 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 가지곤 신이 차지 않는다. 탈춤이 놀이인 것은 틀림없지만, 오늘에 탈춤을 추는 까닭을 그렇게 소일거리 식으로 말해버리고 말 수는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저 알량한 이름뿐인 공화국의 하나인 속칭 제3공화국이라는 주먹의 시대에 탈춤이 치열하게 놀아지기 비롯하였다는 것을 다행스럽게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벼랑끝의 놀이였다. 창과 총 사이의 춤, 최루탄과 탱크 포신 사이의 춤판이었다. 그 뒤 몇 개의 허울뿐인 세칭 「공화국」이 잇따라서 저 상업화한 야구니 축구니 하는 운동경기로 대중의 신바람을 노략질하고 있을 때, 거기다 솔개새에 가랑니 박히듯 들어차기 시작한 각종 유흥장으로 소시민들의 흥을 갈취하기 비롯하였을들 때, 그래도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구태여 탈춤 '얼쑤!'를 고집한 것을 우리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잇다. 각 대학 민속반은 꽹과리 앞세운 탈춤패가 되어 시위 행열의 길군 ? 釉㈏?도맡았다. "왜놈 귀신 물러 가라! 왜놈 붙은 토종잡귀 물러 가라!" 한·일 협정 반대 데모때, 그들은 이렇게 사설을 절규했다. 그럴 때일수록, 한·일협정이란 말이 어째 「한·일합방」같이 들리곤 했다.

  그렇다. 오늘날 탈춤을 놀아야 하는 애간장 타는 간절한 곡절을 이런데서부터 묻기 시작해야 한다 그 암울하던 시절, 사표 내동댕이 치지 못하는 게 그리도 부끄럽던 시절, 이른바 체제와 반체제, 권력과 재야는 여러 가지 극단적 양극현상을 빚어내었다. 그 가운데서 지금 당장 우리들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체제내지 권력이 「반전통」, 「탈민속」임으로 해서 「전통패」가 되고 「민속꾼」이 된 반체제와 갈등을 빚었음을 들어야 한다. 체제측은 서양 제국주의가 우리 민속신앙에게 엎어 씌운 악담이거나 헛소리의 하나인 「미신」이란 말을 답습했다. 그러고는 자신들은 「새것」으로 자처했다. 물론 저들이 민속 분야에서도 「인간문화재」를 지정하고 농촌후계자의 닮은 꼴인 전통문화후계자를 선정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저널리 알려진 「민속경연대회 따위도 조작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그 대세에 있어서 들꽃 말려 죽이고 가화 만들어내는데 정신 팔린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심한 경우 마을굿, 마을고사는 탄압하고 헐려 나갔다. 그 무렵 당집 헐기건수 올리기로 치적을 쌓은 제주의 어느 군수도 있었다면 지금에야 설마하니 누! 가 믿을라고. 한데 무엇보다 민망한 것은 체제측의 민속신앙 고사작전이 일제의 별신굿이나 난장놀이 탄압의 후계자였다는 점에 있었다.

  (2) 時代的 편싸움에 앞장선 탈춤

  반체제측에서는 재빨리 버려질 뻔한 민간전승을 건져 올려다. 그리고는 중요한 전략수단 내지 무기로 삼는데 성공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나 정예무기가 다름아닌 탈춤과 마당놀이였다. 그리고 마침내 「6.25 선언」이란 것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승리였다.

  그중에서도 마당놀이는 이를테면 반체제운동 및 그 저항의 시위에 수반된 「난장놀이」 바로 그것이었거니와 마당놀이가 탈춤판의 즉시대적인 변이였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탈춤의 기층적 주제를 보다더 자유롭고 보다더 즉흥적이고 확실하게 은유적인 「시六英맛?드라마」로 탈바꿈시킨 것이 곧 마당놀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마당」은 곧 민중들의 삶터이자 가열찬 역사의 현장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이 경우 탈춤이나 그 발전적 형태를 취한 마당놀이는 놀이의 중요한 속성의 하나인 「아곤」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놀이를 통한 체제와의 겨루기, 패싸움(편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탈춤은 실상 넓은 뜻으로 가늠해서 편싸움 내지 패싸움으로 관찰될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석전, 차전, 쇠머리대기, 용호놀이(밀양), 용마놀이(울산), 줄다리기 등 겉보기고 이미 편싸움으로 판단된 여러 집단 민속놀이와는 달리, 탈춤은 「극의 편싸움」내지 「편싸움극」이다. 전자의 여러 놀이들이 주어진 지역내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을 내장한 사회성을 띄고 있음에 비해 탈춤은 몇 겹에 걸친 문화적이고 계층적인 사회성을 내장하고 있다. 양반, 승려! , 남성 그리고 「문화」가 한 파라다임(패.편)에 속하고 상민, 천직, 여성 그리고 야성이 또 다른 파라다임(패, 편)을 이루고는 그들 사이에서 발림과 사설의 줄다리기, 돌팔매질이 진행되면 그것이 이내 탈춤이 된다. 상민이 양반에 대거리하듯, 천직이 승려에게 덤비고, 여성이 남성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려 들고, 야성이 문화를 위협하려고 날뛴다. 문화와 야성 사이의 패싸움은 에로스의 주제에서 확연하게 구체화 된다. 필자로서는 야성이 문화에 대거리하되 상민이 양반에게 그리고 천직이 승려에게 대거리하듯 한다는 명제를 존중하고 싶다. 억눌린 문화·사회적인 「이드」란 점에서는 야성이 상민과 다를 바 없다. 규범, 상식, 윤리 등을 이 경우 「문화」의 극적 성격으로 간주하고 싶다. 석전, 차전, 쇠머리대기, 줄댕기기 등이 편싸움이 듯 그 몇 개의 묵은 공화국 시대의 탈춤과 마당놀이는 무전(舞戰) 곧 춤의 편싸움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놀이의 기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중들이 의식의 바닥에 감추어 두었어야 하는 욕구를 극적으로 모방한 「미미끄리」의 놀이란 속성을 이들 두가지 놀이는 훌륭하게 향유하고 있었다.

  제도측에서 「산업화」를 내세워서 탈춤놀이의 텃밭 맥락(컨텍스트)인 마을굿(신앙)을 탄압하는 사이를 비집고 재야측의 마당놀이는 산업화의 주요 산물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누리는 자와 당하는 자', '보수와 혁신'사이의 극대화된 갈등을 소재며 주제로 삼을 수 있었고 그것은 급기야 체제전복의 전략을 위한 돌격대 구실을 감당했다. 이럴 경우 산업현장에서라면 "공순(공돌)"이가 말뚝이나 취발이에게 겹칠 수 있었듯이, 대학생의 데모현장에서는 "피억압자"가 그 극적 구실을 취발이나 말뚝이와 나누어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탈춤과 마당놀이는 옛 모습, 옛 사위, 옛 사설 그대로 오늘을 위한 강력한 그리고 설득력 또는 호소력 있는 알레고리일수 있었던 것이다. 어제의 것이 오늘을 위한 우의법일 때, 우리들은 머뭇댐없이 그것을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탈춤은 그 신명을 마을굿과 나누어 갖는다. 신지핌에 의한 재앙물림이나 잡귀 물림 그리고 그에 수반된 풍요의 기약이 마을굿을 신명판이 되게 한다. 이 경우 마을굿의 길놀이에 탈이 참여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로써 탈은 「신성탈」내지 「종교적 탈」로서 「축귀(逐鬼)가면」 구실을 치러 낸다.

  그 탈이 탈춤에서는 사회적,정치적 악 및 사회적 관례의 악을 쫓는 역을 도맡게 된다. 이때 종교적 축귀와 정치.사회적 축악 사이에 명백한 대비관계가 있음을 보아내기 어렵지 안큨. 양반 잡아 먹는 영노가면은 사자탈과 함께 축귀의 탈로도 쓰일 수 있음을 간과하고 싶지 않다. 놀이탈은 여전히 축귀탈의 여운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이같이 탈춤은 마을굿의 신명을 사회화해서 피워내는 것이다. 이로써 서민들은 묵은 응어리를 풀고 삶의 활기를 되찾는다. 이게 관중 차원의 신명지핌이거니와 이로써 탈춤을 수반하고 있는 마을굿은 계절적 통과의례로서의 소임을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탈춤은 축귀가 목적인 마을굿의 제 2막이자 대단원이다. 이를 확인하면서 우리들은 탈의 얼굴이 개인의 초상이 아니고 사회의 얼굴, 집단의 초상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우리 다함께 탈춤을 논 것이다. 탈꾼만이 논 것은 절대로 아니다 탈의 얼굴은 「공동체적인 얼굴」내지 「사회적 얼굴」이다. 극단적으로 유형화 내지 정형화된 얼굴은 그 얼굴이 표정짓고 있을 집단적이고도 공통적인 내면을 갖추고 있다.

  공동체 누구나의 주어진 시공에서의 소망, 의지 등이 다름아닌 그 내면이다. 그러한 소망에는 물론 잠재의식, 무자각적인 충동까지도 망라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어진 그 시재 그 상황에서 어느 계층, 어느 신분 그리고 어느 나이, 어느 성별에 속한 사람들의 의식과 으지의 공통분모가 탈의 얼굴에는 담긴다. 그런 뜻에서 탈의 얼굴은 「우리의 얼굴」이고 「저들 또는 그들의 얼굴」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탈춤의 갈등은 당연히 「우리」와「너희네」사이의 시비요, 마찰일수밖에 없다. 그것을 달리 말해서 갈등의 주지가 놀란되는 한, 탈춤은 집단적인 편싸움 또는 패싸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 편에는 계층, 성별의 기준이 껴들어 있음은 새삼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탈춤판의 관중은 판바깥에 있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일 구경꾼」이 될 수 없다. 탈의 얼굴의 「우리성」내지 「우리다움」으로 말미암아서 관중은 「보는 놀이꾼」이 된다. 사설을 않고 발림을 겉으로 하지 않을 뿐이다. 관중 자신의 의지며 소망이 혹은 응어리가 춤추워지고 있는 현장성을 강조해서 탈춤의 「판다움」또는 「마당다움」으로 말! 미암아서 관중은 「보는 놀이꾼」이 된다. 사설을 않고 발림을 겉으로 하지 않을 뿐이다. 관중 자신의 의지며 소망이 혹은 응어리가 춤추워지고 있는 현장성을 강조해서 탈춤의 「판다움」또는 「마당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다운 「총체연극(total theatre)」이라고 못부를 아무 이유도 없다. 요컨대 탈춤은 대동놀이다. 더욱, 주어진 시대며 상황에서 문제도리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위협적인 혹은 가장 파국적인 갈등이며 문제가 극화됨으로써 탈춤의 「대동놀이다움」은 더한층 강화되는 것이다.

  탈춤은 「우리놀이」,「우리들 편놀이」가 되는 것이지만 이 때문에 탈춤은 그 「범 시대적 알레고리」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초시대적인 은유의 언어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3) 위기관리의 놀이

  탈춤은 「전복의 놀이」, 「뒤집기의 놀이」다. 사회적 규범, 윤리적 규범을 뒤집어 엎고 놀아대는 춤이 탈춤이다. 그것은 명백한 「난장놀이」다. 난장은 워낙 정규장이거나 정례장인 「오일장」아닌 임시장이란 뜻이지만 그만큼 탈관례적이고 탈일상적인 장이다. 평소의 정규장이 가려두었거나 미처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가려운데를 긁지 못한 대목이 무엇인가를 난장은 익히 알고 있어서 난장의 「사건성」내지 「이변성」이 증폭된다.

  그것은 「이벤트」라고 부를 만한 별난 일이다. 문화·사회적인 「탈조증(脫調症)」이다. 물물교환, 상업거래 등 장 본래의 기능이 뒤로 물리다시피 하고 대규모의 놀이판, 야단굿판이 벌어진다. 난장은 장사장이기보다 놀이장이다. 이 점이 강조되면 정규장 아닌 난장은 문란스런 난장이 된다. 「어지럼장」이 되는 것이지만 온 공동체 전체가 이를 계기로 놀이의 특수효과의 하나인 「일링크스」곧 도취에 탐닉한다. 이 놀이의 도취가 난장놀이의 모태인 마을굿의 신내림과 동곡이곡임은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난장의 문란스러움, 그 어지럼증, 말하자면 「난장판」은 뒤집기 내지 뒤집어 엎기에 의해 절정에 달한다. 상민의 양반에 대한 악다귀쓰기, 천민의 승려 욕보이기 등에 의해서 계층간의 도덕적 규범, 윤리적 규범은 물구를 선다. 반산의 구별과 성속의 구획이 못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성윤리에며 성차별에도 난조가 일어난다. 할미와 영감 사이에서 성의 체위에서 할미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사람여자와 원숭이 수컷사이에서 수간(獸姦)이 벌어진다. 이만하면 조선조 사회에서 뒤집어지고 엎어질 만한 것 가운데 씨알 굵은 것은 포괄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으로 사회와 문화는 「흔들림」을 「어지럼증」을 경험한다. 사회문화적인 지진같은 것이 경험되는 셈이다. 이럴 때 탈춤의 탈은 문자 그대로 "탈났다"의 탈이 된다. 하지만 난장의 흔들림, 탈춤의 흔들림은 「탈조」에 의한 「회조(回漕)」를 결과적으로 수반한 것이었다. 그런 뜻으로 보아 탈춤의 탈조는 엘리어드적인 명제대로 「우주적 혼돈」내지 「신화적 혼돈」에 견주어질 것이고 덩달아서 계절적 통관의례의 일부다운 속성을 감당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므로, "인류학적인 전 문헌이 보여 주듯이 가면은 '범주적 변화'와 짝지어져서 나타난다."는 명제가 우리의 경우에 적용되어도 좋다. 그러나 난장에 가세해서 탈춤이 부추기고 촉발하는 「흔들림」은 일시적이고도 상징적인 흔들림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오히려 정상이 힘을 되찾아 제 자리 찾는 것으로 반전하기 위한 실조 내지 탈조의 흔들림이었다. 별신굿의 신지핌, 신내림은 드디어 사회적인 흔들림에서 그 절정을 과시한 것이다. 신에 지피면 무엇을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무당의 권능이 마을 사람 전체에게로 감염된 결과다.

  이 일시적 흔들림, 난장에 가세한 탈춤의 사회적 흔듦을 정치·사회적 전복 행위 내지 반란 그 자체를 일관성에서 벗어나 치명적이고 확인 사살과도 같은 최종적인 결정타로 전향케 하려고든 움직임, 일종의 난장판 흔듦의 변혁의 움직임이 최수운을 낳는다고 볼 만한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이 변혁의 지도자는 상징적인 뒤집어 엎음을 실질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고자 의도한 것이다. 수운의 "제폭구민"이나 "광제창생"의 기치가 그가 겪은 신내림에 의해 결정적으로 동기지워진 것이라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 난장의 신지핌의 흔듦이 일시적이라면 수운의 신지핌의 흔듦은 최후의 일침, 일격이기를 수운 자신은 기도한 셈이다.

  전자가 상징적이라면 후자는 실질적이고, 전자가 기성질서의 재활성화를 기도한 것이라면 후자는 기성질서의 멸망을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의 영웅성을 드높이 부각하면서 수운은 좌절을 겪었다. 그 좌절을 뒤집어서 최종적인 승리의 단서가 되게 한 것이 묵은 소위 「공화국」들에서 치열하게 불태워진 탈춤과 그 사촌인 마당놀이다. 탈춤판의 양반격인 묵은 몇개 명색뿐인 공화국들은 그래서도 무너져 간 것이다. 탈춤이 그 상징성 속에 잠복시켜야 했던 꿈이 최수운을 거쳐서 마침내 묵은 명색뿐인 공화국시절의 마당놀이에서 실현된 것이다.

  (4) 오늘에 왜?

  이 같이 난장에 수반된 탈춤의 기능의 역사적 추이를 전제할 때, 우리들 당대에 그것이 시대사회적 맥락, 정치적 맥락 속에서 놀아진 필연적인 이유를 캘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암울한 시대에서 탈춤이 놀아질 충분한 곡절이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 사명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 탈춤은 우리들 당대에 있어서 살아 움직이는 우의법으로 구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한 것이다. 당대를 사는 고전으로서 기능한 것이다. 빈부의 격차, 억압과 자유가 서로 길항하고 갈등을 빚는 당대 사회 그 자체가 탈춤 놀이의 판 또는 마당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탈춤은 잘도 놀아졌다. 잘도 신명을 피워댔다. 할 말을 했고 할 것을 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라진 오늘의 상황속에서 묵은 명색뿐인 공화국 시절을 회고하는 것으로 탈춤이 오늘에 놀아질 이유를 댈 수는 없다. 그 당시 그 공적이 눈부셨던 것에 찬사를 바치고 기념비를 세웠다고 해서, 그것으로 지금 당장 탈춤이 현실적인 불가피한 수요가 되는 충분한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그 당시의 공적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오늘의 이유는 오늘답게 달리 물어지고 또 찾아져야 할 것? 甄? 전통은 단절로도 망치지만, 기계적 답습으로도 만성적 질환이 되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상황에서 왜 탈춤을 추어야 하는가? 춘다면 어떻게? 왜? 등의 물음이 다급하게 물어져야 한다.

  (5) 오늘의 공동체 얼굴

  우리들의 첫 물음을 탈 그 자체에 대해 던져 보기로 하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시피, 한국말의 「탈」은 한 사람의 얼굴 위에 씌워진 「또 다른 얼굴」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서 「탈을 쓴사람」이란 말이 「허위의 제 2(3)의 얼굴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게 도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놀이꾼(광대)이 탈을 쓰는 것은 그 탈 아니고는 「못할 말」, 「못할 짓」이었음을 의미한다. 탈을 씀으로써 한 사람은 「놀이의 시공 속의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인데, 이 때 「탈바꿈」이란 말이 변색, 나아가서 「변모」까지를 의미하되, 극단적일 때 「환골탈태」까지도 의미하면서 더불어서 그 「못할 말」또는 「못할 짓」하게 변신함을 의미하게 되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하고 싶다. 탈이 들어서 비로소 하게 되는 말, 행위가 때로 있다면 탈은 또 다른 진실, 제 2(3)의 진실이 될 수 있다. 이 점은 극히 중요하다. 그러기에 탈을 쓴 사람 사이에 인격적 단절이 있는 듯이 말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탈과 탈 쓴 사람 사이에는 이를테면 「상호 접신(接神)같은 정신, 감정적 상호변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탈 쓴 사람은 탈이 내포한 「또 다른 말, 행위」에 자신을 의탁하게 되고, 탈을 탈 쓴 사람에게 자신의 구현을 의? 므磯? 탈은 이 때 이미 껍데기도 얼굴 가죽도 아니다. 탈과 탈 쓴 사람 사이에는 이념적인 미학적인 통합의 완성이 성취되어야 한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희랍어「프로조폰(prosopon)」이나 그 변이인 나전어의 「페르조나(persona)」는 어원적으로 「가면」곧 「마스크」를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프로조폰은 가면, 극적인 구실, 얼굴 등을 의미하거니와 이 점에서는 「페르조나(persona)」도 비슷하다. 그것은 놀이하는 사람 및 놀아지고 잇는 인물의 성격까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조폰이나 페르조나는 탈과 탈 쓴 사람, 탈과 극적 구실 등 몇 겹에 걸쳐 통합적인 의미를 가진 말들이다. 오늘날 왜 탈춤이 놀아져야 하는가를 물을 때도 탈의 이같은 탈과 탈 쓴 사람 사이의 상호접신이 물어져야 한다. 전통적인 오랜 탈, 그 묵은 탈과 오늘의 놀이꾼 사이에서 어떤 상호접신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프로조폰」에서 「프로스」는 「뭣을 향해서」라든가 「뭣을 노려서」라는 의미를 그리고 「오파」는 얼굴이나 눈이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렇듯이 묵은 탈이 오늘의 무엇을 어떻게 맞대하고 있는 얼굴이고 눈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오랜 탈을 씀으로써, 그 오랜 우리들의 신명, 굿과 놀이가 한데 어우러져 이룩할 신바람에 흠씬 취하게 될 ? 痼?기대해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초시공인」이란 뜻이란 일종의 「수퍼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깨비가 모였다 하면, 흥은 놀이와 춤과 노래로 불지피듯이 오늘의 우리들이 우리들의 신념을 탈춤으로 지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탈의 의미 내지 구실과 관련되어서 제기될 물음, 곧 오늘에도 왜 탈을 써야 하는가라는 해답일 수는 없을 것이다.

  「초시공인」이 된다고 해도 오늘을 잊거나 벗어던진 결과여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의 내면세계(사회문제를 내장한)가 직접 탈을 써야 할 것이다. 가령, 민선시대 또는 지역자치라는 제도에 새로운 괴물로서 씌워줄 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민선」또는 「자치」를 기생물이게 강요한 중앙정권의 횡포에도 새 시대의 묵은 재앙으로서 어울일 탈을 씌워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탈은 굳어진 표정이면서도 굳어져 있지 않다. 쓰고 노는 사람과 무대에 따라서 표정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령 희랍인에게 "내면 못 가진 것으로 알려진" 탈의 공백 아닌 여백의 자유다.

  오늘의 새 연극언어가 되자면 오늘날의 탈춤은 탈의 「여백의 자유」를 그 「가변성」을 살려야 할 것이다.

  (6) 시대사회를 흔들어 깨워야 한다.

  이제 둘째 물음은 탈춤의 구실에 관련되어서 제기하기로 하자. 계절적인 공동체의 통과의례는 시간의 쇄신과 공간의 갱신을 촉발한다. 문화·사회적인 「변화의 범주」내지 「변신의 범주」에 드는 주기적인 집단행위다. 한국으로서는 작은 규모로는 해마다 되풀이된 「세시놀이(백중, 단오놀이)」이외에도 대규모로는 격삼년의 별신굿 및 그외 수반된 난장놀이가 이에 속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공동체를 「흔들어 깨우는」일이었다. 흔듦과 깨어 일으킴은 공동체의 계절적 통과의례가 지진 두개의 서로 맞물린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기능이다.

  흔듦은 일부 인류학자에 의해서, '반란의 제전'또는 '뒤집음의 의례'라고 일컬어진 한 무리의 제전이 그렇듯이 의사반란이나 갈등이 노정까지를 전복이나 뒤집어 엎음으로 극화된다. 집단적 응어리나 맺힘이 통과의례라는 「비상구」를 스스로 마련하면서 스스로 폭발하는 것이다. 공동체 전체를 기준을 관측할 때, 휴화산이던 공동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활화산하는 것이 그 통과 의례라고 단정될 만하다. 무엇인가 억눌린 것이 터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어차피 터질 것이 터져야 하는 것이다.

  이 흔듦은 전통적으로 「난장」이라거나 아니면 「난장판」이라거나 일컬어져 왔다. 절묘한 명명법이다. 이 난장은 문란만이 아니라 음란도 그리고 난리도 포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절묘하다. 세상은 일시에 물구를 서고 곤두박히곤 하기 때문이다.

  별신굿의 맥락 속에서 「난장」은 무당의 신비체험인 접신상태의 이크스타지 내지 도취(앙분)상태에 대응할 정신적, 정서적 징표를 간직한다. 별신굿에서는 저 「가락국기」신맞이 대목이 보여주듯, 공동체 구성원이 무당이 접신경험에 간접적으로 감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감염된 신지핌이라고 한다면, 「난장」의 마음 바탕에는 그것이 깔리게 된다. 크게 보아 이것은 사회 및 문화가 갈망하는 「엔트로피」현상이다. 조직과 분담, 계층과 통솔등이 함축할 질서, 규범, 규율등이 요구되고 또 지탱되면서 반작용으로 그 역인 반란, 갈등의 노출, 전복 등이 함축될 무질서며 혼돈을 요구하는 역동적인 연쇄 속에서 난장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서의 항존(恒存)이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면서 공동체를 피폐하게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그 피폐에서 다시금 벗어나 활력소를 얻기 위해 흔들림을 스스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이 찌프두듯한 사람이 허리를 흔드는 짓, 골이 흐릿한 사람이 머리를 흔드는 짓의 동류항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연상하기 알맞은 상황이다. "콜로니즘(Colonism)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퍼질'수! 있고 울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을 소리높이 표출할 수도 있다. 직접 그렇게들 하거나 아니면 귀신의 「말문」이 되어서 그렇게들 할 수 있을 것이다. 귀신은 일상때, 혹은 어른들 앞에서 아니면 애기들 앞에서 내뱉을 수 없는 말도 거침없이 내쏟게 한다. 그 짓거리들은 소박한 '억눌림의 도돌아섬'이다. 의례나 굿은 문화적인 치유행위다." 그러기에 이 흔듦은 일종의 「위기 관리의 의례」내지 「위기 관리의 놀이」다. 일상적인 세속적인 상황속에서 발생해서는 잠복하였거나 억압된 미해결의 문제, 만성적인 고질에 대한 충격요법이라고 바꾸어 말해져도 좋을 것이다. 이래서 흔듦은 깨어 일어서게 하기와 맞물리게 된다.

  탈춤 춤사위가 자연과 인간에 徨?갖가지 「미미끄리」곧 모방을 내장하면서 휘어짐과 뿌림, 굽힘과 폄, 웅크림과 활개짓, 주저앉음과 뜀, 말뚝박기와 회오리 등으로 표현됨직한(?)대극적 역동의 동작을 전개하는 것을 흔듦과 깨어 일으킴의 효과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관찰하고 싶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의 몸사위는 엎드림, 쪼그림, 굽힘, 끈적거림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 논밭에서 일할 때나 가사노동할 때, 그리고 양반 앞에 나설 때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러기에 탈춤의 몸사위가 뿌리고 펴고 뛰는 것으로 억양을 얻게 되는 것은 의미깊게 관찰되어야 한다. 봉산탈춤의 "활개펴기", "개구리 뛰기", "도리깨질 사위"등의 의미는 자못 깊다고 할 것이다. 거기다 탈춤은 예사로 상소리, 욕지거리들이 곁들여진 「말장난」및 「말싸움」에 탐닉하면서 희극적인 효과를 극대화 한다. 그 질쵢한 감정 및(블랙유머)은 이를테면 육두문자 아닌 「육두발림」이라거나 「쌍(소리)발림」이라고 해도 좋을 몸짓과 어우러져서 「야성의 연극」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로써 희극적 효과가 커지고 그리하여 웃는자에게 마침내 승리가 ? 뭬틸윱?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에서 번영 자체와 경제발전 자체가 인간적인 것의 위기로 간주될 만한 상황으로 벌어져 있다. 인간 및 인문적 교양 그리고 인간적 가치 그 자체가 최종적인 피억압자의 자리에 있다. 어젯날 말뚝이와 취발이가 대표할 계층이 속했을 바로 그 자리다. 거기다 이제 엉덩이에 뿔나는 격으로 방자하게 기세를 떨치고 있는 이른바 「정보시대」의 시작 또한 위협적이다. 온 사회가 「정보의 하이 수퍼마켓」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정보가 시대적 「패션상품」목록의 선두에 나설 것도 뻔하다. 정보의 대량소비 사회에서 인간적인 것의 궁핍은 더욱 심화되어 「위기관리」의 놀이로서 위기의 상징적 해소에 나아가 실질적 해소에 이바지 해 온 이 땅의 탈춤의 위대한 전통이 이 새로운 위기 앞에서 어떤 「위기의 제전」을 꾸며낼 것인가를 묻지 않고는 오늘에 왜 탈춤을 추어야 하는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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