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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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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07·15 01:02 | 조회 : 3,919 |


  
탈놀이를 다루고 있는 문헌 기록 중 오래된 것으로 『삼국사기』 권 32「잡지(雜誌)」에 보이는 최치원의 향악잡영을 들수 있다. 즉 신라 시대의 '오기(五伎)'로서 가무백회를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 중 '대면'에서 "누런 금빛 탈을 썼다...."라는 시구(詩句)가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 황금 가면이 있었던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탈 중 가장 오랜 것으로 알려진 것은 6세기 경 신라 시대의 '목심칠면'으로 1946년 경주에서 출토되었는데 나무에 칠을 하고 눈은 황금으로 점을 박았으며 방상씨와 같이 귀면(鬼面)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대면에서 쓰인 황금 면과 같은 계통의 탈이 아닐까 추측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의 탈의 기원은 적어도 삼국 시대 훨씬 이전이 된다. 이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와 고려, 조선의 탈을 순서대로 짚어 가 보자.

 1) 고구려

  고구려 고분이나 벽화를 보면 당시의 춤이나 음악을 그대로 접하는 듯 고구려인의 빼어난 미적(美的)슬기를 느끼게 된다.

  고구려인들은 이미 4세기 이전부터 마상재(馬上才), 칼싸움, 막대기와 공을 던지는 농환(弄丸)등의 잡회가 성했으며, 『고려사』에는 고구려 가악(歌樂)의 명칭이 기재되어 있다.

  고구려 악은 당시 중국을 풍미한 서역악, 곧 악기뿐만 아니라 탈춤까지 고루 수용함으로써 좁은 의미의 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가'·'무'가 함께 어루러 지고 있다. 이것은 이후 조선조의 연화대에까지 전승되고 있음을 본다.

 2) 백제

  고구려, 신라와는 또 다르게 독창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온 백제는 특히 지리적으로 왕래가 용이했던 중국 남조(南朝)의 여러 왕조와 교류함으로써 빠른 시기에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 무왕 13년 612에 백제 사람 미마지가 기악(伎樂)을 남중국의 오(吳)나라에서 이본에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기악이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기악은 익살스러운 춤과 몸짓으로 연출하는 10과정(科程)으로 된 재담없이 발림으로만 엮는 탈놀이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이 역시 우리 나라에 전승되는 산대놀이와 같은 계통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한편 우리 나라의 경우는 발림굿인 기악에서 대사극으로, 신앙성을 띤 놀이에서 세속적인 놀이(예컨대 산대놀이)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3) 신라

  한가위나 팔관회에서 연희되었던 신라악들은 다분히 중국의 '산악백회'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크게 검무(劍舞), 무애무(無碍舞), 처용무 오기(五伎)를 꼽을 수 있고, (이 가운데 무애무만이 탈춤이 아니다) 여기서는 검무와 처용무를 중심으로 신라악을 설명하기로 한다.

 가. 검무

  검무의 유래는 신라의 황창이란 7세 소년이 검무를 빙자하여 백제왕을 죽이고 목숨을 잃 었으므로 신라인들이 이를 가상히 여겨 이 놀이를 시작하였다고 문헌에 전하고 있다. 그 러나 일설에는 황창은 관창의 와전일 것이라 했는데 신라 품일장군의 아들 관창이 소년 용사로서 태종왕대에 백제 공격에 참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백제의 계백 장군에게 피살 된 사실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이 춤은 단순한 모의무(模擬舞)이나 검술의 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탈을 쓰고 연희하는 연극성이 짙은 탈놀이였다.

 나. 처용무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이 춤은 우리 나라의 뿌리깊은 토착 신앙과도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즉 처용은 본디 동해 용왕의 일곱 아들 가운데 한 분으로 헌강왕을 따라 경주로 와서 벼슬도 하고 아내도 얻었는데 아내가 외간 남자(나쁜 귀신)과 동침하는 것을 보고 꾸짖기는커녕 '처용가'를 불러 뉘우쳐 물러나게 하였다. 이러 한 일이 있은 후로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만들어 대문 위에 걸어 놓음으로써 나쁜 귀신을 쫓았다 한다. 이 처용 설화는 실제로 신앙성을 띤 주술 전승(呪術 傳承)으로 일상 생활 속에서 전해지는 가운데 그 형상인 '처용탈'이 신앙적 상징물로 떠받들어지면서 굿에 서 탈춤놀이로 발전하여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4) 고려

  고려는 국가의 명절과 불교 행사에 있어 매우 규모가 크고 횟수 또한 잦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때에는 다같이 등불을 환히 밝혀 '채붕(綵棚;오색비단으로 장식한 다락 곧 장식한 무대)'을 설치하고 가무백희로 큰 잔치를 베풀어 부처님과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왕실과 백성들의 태평을 기원했다.

 가. 산대잡극(山臺雜劇)

  불교가 전래된 이후 신라 때부터 무속 신앙이 기반이 되어 서민 놀이와 외래종교인 불 교의 영향으로 발전하게 된 이 놀이는 고려 시대에는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적인 큰 행사에서 연희되었다. 여기에는 처용무, 곡예, 불꽃놀이 등 다양한 잡희와 함께 산대놀이 가 펼쳐졌던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나. 나희(儺戱)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아내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구나 의식에 불과했던 굿이었으나 나중에 창우(倡優) 또는 광대 심지어는 무격(巫覡)들의 놀이로까지 확대되었다. 역대 왕들의 비호를 받으며 벽사의 굿으 로 발달된 이 놀이는 국가에서 관장하였으며, 이때에는 '오방귀무(五方鬼舞)'와 같은 제사춤 을 비롯하여 '곡예' '탈놀이' '답교' '처용무' '백수무(百獸舞)'등을 펼쳤다. 이 가운데 곡예와 답교 외에는 모두 탈놀이로 짐작된다.

 5) 조선조

  조선에 와서도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만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면서 산대잡극이나 나례쪽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는다. 산대놀이는 산대에서 노는 온갖 놀이라는 뜻으로 나례도감(儺禮都監) 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이 관장하였으며 음악과 춤을 곁들인 놀이라는 측면에서 '나례' '나희' '산대나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졌다. 궁중의 산대놀이는 경비가 많이 소요되고 유교적 도덕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인조 12년에 일시 중단되기도 했었다.

 가 산대나희(山臺儺戱)

  조선의 산대놀이는 줄타기, 방울받기, 곤두박질, 토화(吐火) 등으로 연출되는 탈놀이와 무 용, 곡예인 규식지희(規式之絲)와 즉흥적인 재담이나 화술로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연희하 는 소학지희(笑謔之戱), 그리고 악공(악사)들의 음악 등의 3부 행사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산대나희는 풍요를 기리고 귀신을 쫓는 나례로서, 그리고 외국 사신 영접이나 조정의 각종 행사에는 꼭 빠지지 않았던 절차로 이어져 왔으나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관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도감패'들은 뿔뿔이 흩어져 차츰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산대놀이의 광대들은 그들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여러개의 놀이패를 조 직하여 오늘날까지 그 맥을 전승해 내고 있다.

 나. 조선의 처용무, 학무

  그 연원을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처용무는 많은 변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처음에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붉은 탈과 검은 옷에 사모(紗帽)를 쓰고 춤추게 했으며, 그 뒤에는 중국의 '오방무'의 영향을 받아 '오방처용무'로 확대되고, 이후에는 다시 학연화대처 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로 가무 극화(歌舞 劇化)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처용무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표적인 탈춤이었으나 지금은 처용무, 학춤이 거의 별개로 추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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